오래전에 살았던 집 앞을 지나가볼 기회가 생겼다.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그 집들을 일일이 다 추억하지는 않는다. 기억은 하지만 딱히 추억할 만한 일이 없는 집들도 많다. 해외에서 살았던 집들은 다르다. 짧게 살았거나 길게 살았거나 그 집들을 떠날 때마다 내 평생 이제 여기 다시 와볼 일은 없겠구나 싶어져서 한참 동안 그 집을 쳐다보곤 했었다. 2000년대 초반에 베이징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최근에 그 집 앞을 다시 가보게 되었다.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뀐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집의 위치조차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집이 이제 집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 열배쯤 올랐다고 동행을 했던 중국인 친구가 말해주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때도 내 집이 아니었으면서도 괜히 속..
‘청년’이라는 글자를 앞에 두고 활동하다 보니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최근에는 책을 두 권이나 받았다. 두 권 모두 흔히들 ‘밀레니얼’이라 말하는 내 세대를 분석한 책이었다. 찾아보니 요즘 밀레니얼을 주제로 한 책이 유행이라고 한다. 올 한 해만 비슷한 주제의 책들이 20종 이상 나왔다는 기사도 있다. 원래 있었던 1990년대생을 새삼스레 ‘온다’고 표현한 책은 40만부 가까이 팔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그렇게까지 팔린다고?”였다. 청년이, 우리가 궁금한가? 궁금해서 한다는 게 독서인가? 궁금하면 보통 말을 걸지 않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보내주신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두 권 모두 끝까지 읽기를 포기해버렸다. 끝까지 청년을 ..
지난주 수요일부터 국회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려진 선거제도 개혁 협상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난생처음 1인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매일 녹색당 차원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국회의원들이 누리는 각종 특권을 지적하고, 예산낭비 사례들을 폭로하며, 그간 저질러온 비리와 잘못들에 대해 고발도 하고 있다. 이런 활동이 정치 불신을 더 부추기지 않느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솔직히 대한민국의 정치 불신, 정치 혐오는 이미 극에 달한 지 오래다.이런 정치 혐오, 정치 불신을 누가 만들었는가? 거대정당들이 장악한 국회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자기들끼리 연봉을 정하고,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감춰왔다. 그래서 지금은..
최근 가족이 장기요양제도 혜택을 받게 되었다. 사회가 장기요양노인 한 분을 돌봐드리면, 그 노인은 물론 노인을 둘러싼 여러 가족과 그 구성원의 복지가 함께 좋아지니 일타다피(一打多皮)의 효과적 복지가 아닐 수 없다.지난 10월 말 보건복지부는 내년도 장기요양보험료율을 8.51%에서 10.25%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2020년 장기요양보험료는 세대당 평균 2204원 인상된 1만1273원 정도로 예상된다. 3년째 비교적 큰 폭의 인상률로 경총 등 가입자대표의 우려를 샀다. 2008년 도입 당시 보험료가 2543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2020년 보험료는 4.4배가량으로 대폭 높아졌다. 보험료 인상의 주된 요인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장기요양수급자의 자연증가와 함께 경증 치매, 인지 지원 등 수급자격 범위 확대이..
여기 하동 악양은 대봉감 좋기로는 첫손에 들고, 매실은 섬진강 건너 다압 다음으로 친다. 그래 어디든 감나무가 있는데, 감 농사를 짓는 젊은 농사꾼들이 제법 된다. 사거나 빌리거나 감밭을 마련해서 바짝 감 농사를 지으면,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 수 있는 만큼 어찌어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마을에도 우리집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감 농가가 있다. 두 집 모두 삼남매이니, 이 아이들끼리만 모여도 여섯. 서로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라 주말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논다.“다, 떨어졌지. 이쪽 바람길에 있는 나무들은 다 떨어졌어.” 한데 지난가을 두 번이나 찾아온 태풍에 이 집 감들이 많이 떨어졌다. 바람길에 마주한 자리에 있던 나무들은 열매가 거의 없는 것도 ..
날 추워지니쓸쓸한 짐승이 자꾸 기어 나온다음식 쓰레기 버리러 가면검은 길고양이 얼어붙은 채 서 있고나는 겨울이 싫은 거다오직 생계만 남은 생계가 두려운 게다그래도 가끔 밥 한술 나눌 친구들이 있어외투도 없이 술 취한 거리에서막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다시간은 얼음벽을 지나가고하필이면 누추한 계절에 실직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막막하게 눈물이 솟는 게다차창 밖으로 눈발 쏟아지는 꿈을 꾸다문득 깨어보면 버스는 어느새 종점에 와 있고나는 길고양이들이 서럽게 우는 것이 무서워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소리를 죽이는 거다어디 빈 우체통 속에라도 들어가 오는 소식들을 듣고 싶은 게다삭풍처럼 야위는 시간에 빈 잎사귀라도 달고 싶은 것이다 오민석(1958~)어느덧 추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기가 돈다. 시인은 생활..
참으로 희한합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한두건도 아니고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일들만이라도 기록을 위해 이 지면에 새기니 독자들은 꼭 끝까지 읽고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례 1. 폭행과 협박을 통한 지속적인 강간은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성의 성을 도구화한 자에게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강간 치상 및 특수강간 혐의에 면소 및 공소기각을 선고하면서, “시골, 고졸 출신으로 ‘장벽’을 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말을 얹는 판사.사례 2. 성매매, 성매매 알선, 변호사비 업무상횡령, 증거인멸교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식품위생법 위반 등), 해외 원정 도박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수많은 범죄 혐의가 있는 자에게..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이 17일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심이다. 정작 떠나야 할 사람들은 요지부동인 상황에서 개혁 성향의 두 젊은 정치인의 불출마 선언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권의 지지부진한 인적 쇄신에 불을 붙이고, 세대교체를 앞당길 수 있다면 그 울림은 매우 클 것으로 평가한다. 두 사람의 불출마 선언을 계기로 여야 모두 구시대적 이념과 지역주의를 뛰어넘는 참신한 대안세력을 발굴하는 데 더 속도를 내기를 기대한다. 눈길이 가는 건 김 의원의 강경 메시지다. 그는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한국당 지도부는 물론 의원 전체가 총사퇴하고 당을 해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당은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 “좀비 같은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