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선물받았다. 특별한 쌀이라고 했다. 햅쌀이 나왔는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지난 지도 한참, 아니 벌써 겨울의 초입. 누가 첫눈 올 때 소설을 시작했는데 마감을 하고 밖에 나왔더니 벚꽃이 만발했더라는 얘기처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세월은 그렇다치고 쌀도 선물하는 시절이구나 생각했다. 차나 커피를 선물하듯. 햅쌀이니 평소보다 물을 적게 넣어서 지으라고 했다. 밥만 먹어도 맛있겠지만, 밥맛을 제대로 살려줄 특별한 김도 함께 주었다. 일찍 수확해 말린 최고급 김이라며. 특별한 햅쌀밥과 최고급 김. 잘 익은 조선간장만 있으면 완벽한 조합일 터. 헤어질 때 손을 꼭 잡으며 당부했다. 밥 잘 해먹고 다녀. 혼자라고 맨날 시켜먹지 말고. 그 말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시시로 울컥거리는 걸..
언어는 인식을 보여주는 창이다. 그리고 어떤 언어가 통용되는가는 그 사회의 인식을 반영한다. 사회 인식이 반영된 언어는 규범이 되어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 1953년 제정된 형법에서 성범죄를 규정한 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정조’는 ‘여자의 곧은 절개’ ‘순결’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은장도가 떠오른다. ‘정조’는 여자가 ‘죽을 힘’을 다해 항거하여 지켜야 할 것, 여자의 도리였다. 봉건적 ‘정조관념’에 바탕을 둔 성범죄 규정이 어땠을지, 그것이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물론 반성폭력운동을 통해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제목이 바뀌기는 했다. 그러나 정조관념이 반영된 성범죄의 판단기준과 세부 규정은 변하지 않은 채 66년이..
우리는 지금 폭력과 독점 등 이기적인 것에 저항하며, 법을 바로 세우고 진실을 밝히고 공정을 이루기 위해 뜨거워지고 있다. 조국, 검찰, 양극화, 세월호, 부동산, 교육, 일자리 등이 발화점을 넘겨 한국 사회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온도가 궁금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말, 4개의 질문(전국 700명, ARS 휴대전화 여론조사)을 던졌다.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에서 개념을 설계한 밈(Meme). 인간의 유전자와 비슷하게 인류의 문화적 유전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밈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가진 능력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발전 단계를 색으로 표현한 경제이론에 착안, 설문지를 만들었다. 우선 한국 경제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
날 때부터 누구나 홀로 와선제 그림자 거두어 저물어 가는 것 빛나던 날의 향기도,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도오직 한 알 씨앗으로 여물어 남는 것 바람 크게 맞고비에 더 얼크러지고햇볕에 더 깊이 익어 너는 지금 내 손바닥에 고여 있고나는 또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생의 젖은 날개 파닥파닥 말리며꼭꼭 여물어, 까맣게 남는 것 배창환(1955~) 가을에 거둬들인 씨앗이 있다. 이 씨앗을 뿌리면 싹이 트고, 잎과 줄기가 자라서 펼쳐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여물고, 다시 씨앗으로 남을 것이다. 씨앗은 혼자 어두운 땅속에서 잘 준비되어 마침내 빼주룩이 움트겠지만 이후에는 돌풍과 궂은비와 땡볕을 만나고, 또 개화(開花)라는 환호의 때를 만나고, 가을의 끝까지 무르익을 것이다. 그리고 한 톨의 까만 씨앗으로 남을 것..
산업혁명 이전에는 먹고살기 위해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일자리를 가지고 일했다. 이후 산업이 활성화되고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에 따라 장기간 고용되는 안정된 일자리가 늘어났다. ‘평생직장’까지 출현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직업 상황도 달라졌다. 자동차 공유회사 집카의 창립자 로빈 체이스는 말했다. “아버지는 평생 한 가지 일만 하셨다. 나는 평생 여섯 가지 일을 할 것이고, 내 자녀는 동시에 여섯 가지 일을 할 것이다.” 암울한 미래가 아닐 수 없다.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모바일 앱이나 인터넷 접속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일자리 중개시장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도 대부분 기업은 고객들의 수요에 대비해 직원을 뽑고 있다. 그러나 고객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를 요구하고, 서비스 제..
어느 대기업이 근거 없는 투서로 ‘우지파동’이란 고초를 겪고 결국 무죄판결은 받았지만 경영상 타격으로 법원의 화의절차에 들어간 지 10년 만에 절차가 종결되었다. 절차의 특성상 종결에 어떤 결정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담당판사가 경영주인 회장이 꼭 판사실로 와야 한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와 함께 출석해서 절차 종결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서류를 한 장 받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준엄한 목소리로 판사의 일장 훈시가 이어졌다. 경영에 만전을 기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며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백발의 회장이 마냥 조아리며 듣고서 판사실을 나오더니 법원 마당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자 그가 한 말은 “내가 죄인이지요”였다. 도대체 판사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 그런 훈계를..
요즘, 화제성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드라마 의 등장인물들은 만화 속 세상에서 산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질 ‘스테이지’에 끌어내면 기억을 잃고, 작가가 준 대사를 읊는다. 로맨스 만화라 남주, 여주, 서브남, 엑스트라 등의 역할에 따라 주어진 설정값이 있고 스테이지에서는 그것을 벗어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스테이지’ 바깥인 ‘섀도’에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하면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에 의문을 지닌, 자아를 가진 캐릭터들이 있다.이들은 밥맛 없는 녀석을 짝사랑해야 하는 역할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고, 곧 죽어야 하는 운명에 거스를 방법은 없는지 궁리를 하기도 한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스테이지’에 올라 연기를 하면서 ‘섀도’에선 반전을 꿈꾼다. 자아가 있는 녀석들은 ..
제주도는 얼마 전까지 ‘힐링의 섬’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난개발이 이어지면서 ‘힐링’이라는 표상(表象)은 거의 무너져 버렸다.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협소한 생활 공간과 부족한 자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제주도는 섬의 고유한 모습을 잃고 서울 같은 대도시의 외관을 답습하고 있다. 일견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이다.제주도에 공항을 하나 더 짓는 것이 당장은 하나의 치적이 될지 모른다. 제주도는 항상 미개발의 상태를 감수하고 살아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제주도가 서울처럼 될 수는 없다. 자기의 역량을 알고 고유성을 신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득책(得策)이다. 제주도민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을 때, 제주도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섬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