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왔다. 환부를 그저 방치했다간 곪아버릴 수 있다. 내면의 아픔도 마찬가지. 악성 종양을 수술로 도려내듯, 정교한 언어의 메스로 분리할 수 있는 고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언어화하는 과정은 스스로의 아픔에 거리 둘 수 있게 하고, 자기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아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 정서적 치유를 돕는다는 사실은 직접 경험한 바다.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얘기라도 좀 더 흥미롭게 말하려 궁리하는 것이 청자를 배려하는 태도이고,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많은 경우 흥미로운 법. 또한 웃음은 힘이 세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신경계는 움직임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움직이는’ 동물들에게 있다. 극단적인 예로 멍게류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어린 시절에는 신경계를 갖고 있지만, 적당한 곳에 정착해서 움직이지 않게 된 뒤부터는 신경계를 몸속의 지방처럼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서 없애버린다.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몸의 위치와 자세가 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움직이려면 신경계가 시간을 인식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날아오는 공이 언제쯤 내 손이 닿는 곳에 도달할지 예상하고, 거기에 맞게 뛰어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에 맞추어 발을 움직이는 것도 박자의 간격을 인식하고 다음 박자를 예상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휴대폰 시계 하나로 수백 밀리초에서 수 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도 재고, 몇 시간에..
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지간처럼 소가 닭을 보듯 닭이 소를 보듯 하며 오랜 세월 서로를 견뎌왔다. 어떤 점에서는 현명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대놓고 으르렁거렸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줬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 부자는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에둘러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이였음에도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일화는 너무 많아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쯤 편지가 도착하리라 여긴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이미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갔을 테니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을 거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가 아니던가. 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0일 “죽기를 각오하겠다”며 난데없이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당초 청와대 앞 광장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경호상 문제로 제지당하자 이날 저녁 단식농성 장소를 국회 본청 앞으로 변경했다. 황 대표는 청와대 앞에서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더 이상 무너지는 대한민국의 안보, 민생,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절체절명의 국가위기를 막기 위해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황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철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 포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철회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이들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단식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뻔히 수용 불가한 요구를 내걸고 ‘단식’이란 극한 수..
한·중·일 3국이 함께 연구한 첫 미세먼지 공동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2000년부터 각국 연구자들이 대기오염물질 연구를 시작하고 최신 데이터까지 함께 분석해 19년 만에 내놓은 첫 보고서다. 한계가 없지 않지만 중국이 처음으로 한반도 미세먼지 발생의 중국 영향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미세먼지는 국민 건강권, 기본적인 삶의 질 문제인 만큼, 각국이 미세먼지 감축에 긴밀히 협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20일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동북아 장거리 이동 대기오염물질 국제 공동연구(LTP)’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3개국 초미세먼지 발생 요인의 자체 기여율은 한국이 연평균 51%, 중국 91%, 일본 55%로 나타났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국내 요인이 절반가량이지만, 중국 초미세먼지는 대부분 중국..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하던 미국의 제임스 드하트 수석대표가 지난 19일 회의 시작 80여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드하트 대표는 “한국 측 제안이 공정, 공평한 분담을 바라는 자국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측에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일찍 나왔다”고 했다. 또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지난 7일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을 관저로 초청해 ‘분담금 50억달러 인상’을 20회 이상 직설적 화법으로 언급한 사실도 드러났다.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기 위해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비상식적인 압박과 외교적 결례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방위비 분담금은 주한미군 내 한국인 고용원의 임금과 군사 건설비, 군수지원비 등 주한미군의 주둔에 필요한 경..
벼농사 마친 들판에 덩그러니 남은 볏짚은 숨바꼭질하기 좋은 장소다. 싹둑 잘린 볏논의 가지런한 빈터에서들 손야구를 즐겼는데, 고무공을 던지면 주먹으로 치는 야구였다. 공이 가볍다보니 투수는 바나나킥 못지않은 마구를 던질 수 있었지. 맨 바람에 볼이 빨개지도록 들에서 놀곤 했다. 그럼 볏짚을 둘러쳐 뚝딱 바람막이 ‘벽집’을 지었다. 볏짚을 태워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했다. 산으로 가면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나뭇가지로 지붕을 엮고 비닐을 덮고, 낙엽을 주워 바닥을 깔았다. 두셋이 들어가면 무릎이 닿았는데 친구들과 지은 첫번째 집이었다. 모험심 강한 아이들은 저마다 비밀기지를 하나씩 두었다. 나는 예배당 뒤에 세례식을 베푸는 시멘트 욕조가 있었는데, 그곳에다 대나무를 썰어다가 엮고 지붕을 만들어 비밀기지로 썼다..
서기 542년 이집트 북동부 펠루시움(현재 포트사이드) 인근에서 열병이 발생했다. 경미한 열로 시작해 사타구니나 겨드랑 등이 부풀어 오르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다 저절로 치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악화되면 죽음을 알리는 검은 고름집이나 등창이 온몸을 뒤덮었다. 흑사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동로마제국 황제도 전염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살아났지만 이유를 몰랐다. 단지 황제의 소박한 식사 때문일지 모른다고 추정할 뿐이었다. 경작자를 잃은 제국의 도시는 텅 비었고 추수할 곡식과 포도나무는 땅에서 시들어갔다. 전염병은 사라졌다 발생하기를 반복하면서 52년간 지속됐다.800여년이 흘러 1300년경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평원지대에서 출현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유목민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1340년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