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27일은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빨리 퇴직할 이유가 없다, 성차별적 정년제는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전화교환원 김영희씨가 대부분 여성인 교환직렬 정년을 일반직 55세보다 낮은 43세로 정하고 자신에게 정년퇴직을 통보한 것은 헌법과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며 한국통신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리를 거뒀다. 7년의 소송에서 노동계·여성계를 중심으로 일터에서의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후원회가 결성됐다. 여론이 뜨거워지며 1989년 12월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으로도 이어졌다. 이 판결은 2008년 사법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바꾼 시대의 판결 12건’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시대적 의의를 지닌다.30여년 만에 이 판결을 떠올리게 하는 대법원 판결이..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10일 청와대에서 만찬을 함께했다. 문 대통령이 모친상 조문에 사의를 전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관저에서 주선한 회동에서는 사전 협의된 의제 없이 3시간 가까이 국정 현안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선 임기 후반기 첫날을 야당 대표들과의 국정 대화로 시작한 셈이다. 앞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정의용 국가안보실장·김상조 정책실장도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 방향과 각오를 밝히는 언론간담회를 가졌다. 청와대 3실장이 한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은 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19일엔 시민들과 타운홀 형식으로 100분간 의견을 주고받는 정책대화도 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리저리 국론이 갈라진 ‘조국 사태’의 진통 끝에 국정운영의 첫 단추를 소통으로 끼운 의미는 크고..
공정거래위원회가 10일 인터넷(IP)TV를 운영하는 국내 1·3위 통신사인 SK텔레콤, LG유플러스의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티브로드 합병 및 CJ헬로 인수를 각각 승인했다. 최종 인가 절차가 마무리되면 국내 유료방송시장은 ‘KT·LG·SK 통신 3강 체제’로 재편된다. 인수·합병의 빗장이 풀리면서, IPTV 업체의 딜라이브 등 중소 SO 인수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라고 한다. 시장의 80%를 점유할 ‘3사 카르텔’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란 이야기다. 공정위 결정은 유료방송시장이 IPTV 중심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정으로 보인다. 유료방송시장은 2017년 IPTV가 케이블(CA)TV를 추월한 뒤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수익이 급락한 SO업계는 IPTV와의 합병을 원할 정도라고 한다. 유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근 지인들과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공개됐다. 전씨가 지난 3월 이후 광주지방법원에 재판에 출석할 수 없는 사유로 제시한 알츠하이머가 꾀병임이 드러난 것이다. 전씨는 5·18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격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마저 저버린 전씨의 처사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촬영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전씨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모습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과 다름없이 골프를 치고 자신의 의사도 명확하게 표현했다. 전씨는 5·18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는 임 부대표의 질문에 “내가 왜 발포 명령..
올해 4월, 제주행 대한항공 항공기가 이륙 2분 만에 긴급 회항했다. 김포공항 이륙 도중 새가 빨려 들어갔고, 펑, 펑 소리와 함께 비행기 엔진에서 불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항공기엔 승객 188명이 타고 있었다. 새가 항공기와 충돌하는 ‘조류충돌’은 항공기 운항의 가장 큰 위협요인이다. 국회에 제출된 국토교통부의 자료를 보면, 2014년부터 올해 7월 말까지 발생한 조류충돌은 총 1459건에 달했다. 한 해 평균 260건, 매달 22번꼴이다. 엔진충돌, 조종석 전면 유리충돌 등 다수가 아찔한 상황이었다.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2009년 뉴욕 허드슨강의 항공기 비상착륙도 조류충돌이 원인이었다.신규 공항을 지으려면, 항공기와 조류 또는 야생동물의 충돌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조류 및 야생동물 충돌 위험 ..
아무 계획도 없이 가을 제주에 다녀왔다. 한림 해변 쪽에 3일, 성산 해변 쪽에 3일 숙소를 예약한 6박7일의 일정이었다. 첫날에 한라산을 올랐다. 성판악에서 출발해 백록담을 보고 원점 회귀하는 코스였는데 꼬박 8시간이 걸렸다. 힘들긴 했지만 백록담을 실제로 봤으니 나름 대만족인가. 구렁이처럼 경사면을 넘어온 구름에 거대한 분지가 가려졌다가 맑아졌다가 하는 대자연의 풍광은 비록 많은 등산객의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다음날엔 좀 쉽게 다니자며 둘레길 걷기에 나섰다. 그렇게 고른 게 둘레길 10번 코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대륙을 폭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만들어놓은 알뜨르비행장과 비행기 격납고, 한국전쟁 당시..
한강 하류에 있는 신곡수중보는 김포대교 아래에 한강을 가로질러 막은 1007m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한강을 막은 883m의 고정보가 있고 김포 쪽의 124m 가동보에는 5개의 수문이 있어 여닫을 수 있다. 평소에는 한강물이 고정보 위로 살짝 넘어가고 밀물 때는 상류로 물이 흘러간다.2015년 활동가들과 함께 신곡수중보 200m 앞 한강물에 뛰어들어 “신곡수중보를 열어라”고 외쳤을 때, 우리가 바란 건 녹조가 가득한 한강의 수문을 한 번 열어 하류로 흘려보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우리가 하천을 개발하고 이용해온 방식을 성찰하고, 강을 강답게 가꾸어가자는 촉구였다. 30여년 전 신곡수중보를 만들 때부터 수질전문가들과 언론은 수질 악화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2009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
고등학교에서 클러스터 수업을 몇 해 한 적이 있다. 개설된 다양한 교과를 학생들이 직접 신청하여 참여한다. 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 소논문 작성 등이 기록되고 자기소개서에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입시와 무관하지 않으니 강사로서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교사들이 특정 학생에 대한 기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토요일 수업이라 교사들이 돌아가며 출근해 공지사항이나 간식을 전달해줬는데,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늘 한 명을 애지중지한다. “착한 예쁜이, 이 수업 들어? 공부도 잘하고 정말 부지런하구나.” 내게도 슬쩍 말을 흘린다. “저 친구 잘하죠? 학교 에이스랍니다.”평가 전부터 내 시야는 오염되었다. 그 학생이 대답을 잘하면 ‘역시’라고 생각하고, 망설이면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나마 나는 속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