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부터 넉 달에 걸쳐 집수리를 하고 있다. 사사건건 까탈을 부리는 나와 업자의 게으름이 한데 뭉쳐 더디고 또 더디다. 지금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지만 문제는 책방이다. 그동안 책을 작은 도서관에 기부도 하고 후배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직 작은방 하나가 책이다. 그 방을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지만 정리를 해야 할 일이기에 그동안 뒤죽박죽이 된 책방의 문을 닫지 않고 지냈다. 자꾸 봐야만 치울 것 같아서이다.이제 겨우 짬이 나서 어떻게 정리를 할까 가늠하며 책을 들춰보다가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샘터’라는 잡지의 휴간 소식이다. 12월호를 발간하고 당분간 쉬겠다지만 휴간이라는 것이 곧 폐간이라는 사실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짐작할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책방에 들어가 ‘샘..
“묵은 양반이라 함은 낭비하여 선조의 재산을 탕패(蕩敗)하고 게을러서 가업을 경영하지 못하여 나라에 대하여 유익한 국민 되지 못하고 가정에 대하여 직책을 다하는 가족 되지 못하고 아무 사업하는 것 없이 공연히 내가 양반이다 하는 묵은 생각만 품고 앉아서 예전에 문벌이 낮은 사람이 잘되어 가는 것을 보면 ‘상놈이 되지 못하게 제아무리 하면 상놈이 아닌가’ 하는 완고하고 어두운 옛 생각만 하고 새로이 사회의 상당한 지위에 서는 사람을 쓸데없이 업신여기며 서로 친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진정한 사회의 융화를 방해하는 위인이라.”(매일신보, 1917년 1월25일) 바뀐 세상에서 ‘잘되어 가는’ 문벌 낮은 사람들을 천시(賤視), 질시(嫉視)하는 ‘묵은 양반’들을 나무라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글이다. ‘새로이 사회의 ..
“79년생 정대현도 아프다.” 한 주간지가 영화 의 주인공 정대현(공유)의 옆모습을 커버사진으로 다루면서 붙인 표제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문득 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어졌다.은 여러모로 동명 원작소설의 미래형이다.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로 끝났다면, 영화는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제 가족들은 김지영의 ‘아픈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고립되었던 김지영이 그들 덕분에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게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작가로 거듭난다.이 작품을 미래형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에 달린 악플 이후에 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로부터 얻..
내년 3월부터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법)’이 일부 개정되어 시행된다. 학교폭력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중학교 학생부장으로서 내년 개정 ‘학폭법’이 시행되기 앞서 몇 가지 우려점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학폭법’의 성과는 우선 폭력에 대한 심각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애들이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던 인식도 바뀌고, 집단따돌림 같은 정서적 측면의 상처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하지만 학교폭력을 죄와 벌이라는 응보적 관점으로 접근해 처벌 중심으로 흐르면서 가해자, 피해자 모두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상황들이 생겼다. 이는 민원으로 이어져 학교는 더 힘들어졌다. 교육청은 그 대책으로 더 자세한 매뉴얼을 하달하고, 학교는 자체적으로 소..
박과에 딸린 동아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겨울에 먹는 참외라 하여 다른 표준어로 동과(冬瓜)라고도 하죠. 서리 내리고 이맘때가 한창 수확할 때네요. 동아는 수박을 옆으로 곱절 남짓 늘린 듯 크고 길쭉하니 1m까지도 자랍니다. 무게는 50㎏까지 나가고요. 심심한 맛이라 나박나박 자르거나 채를 쳐서 양념 버무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장거리 항해 때 식수 보조용으로 잔뜩 실었다고 할 만큼 전체의 90%가 물입니다. 이뇨효과도 있어서 요즘 다이어트 식품으로 떠오른다지요. 그래서 못 먹던 옛날에는 살 내린다며 외려 피하기도 했습니다.이 동아가 등장하는 속담이 ‘동아 속 썩는 것은 밭 임자도 모른다’입니다. 아무리 친해도 마음속 깊은 근심까지 다 알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동아를 보기 귀해진..
창간특집 인터뷰로 장혜영씨(32)를 만났습니다. 혜영씨는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31)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시설에 격리돼 사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동생을 시설 밖 세상으로 이끌었죠. 초고를 혜영씨에게 보냈는데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비장애인 누구도 사회에서 홀로 살지 못한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장에서 차별이 보이나요?혜영씨는 “ ‘장애’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적으로 쓰인 듯한 오해가 생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오해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것,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장애’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메시지를 받은 순간, 저는 뒤통수부터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혜영..
“법사위는 하루하루 지옥이었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고백이다. ‘조국 대전’의 상징적 전투장이 되었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공격하고 짓밟고 적대하는” 대결 정치의 끝장을 목도했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법사위는 정쟁의 최정점에 있는 상임위다. 법사위는 체계·자구 심사권을 고리로 모든 법안 통과의 최종 길목을 장악하고 있다. 대치 정국 때마다 법안 통과를 볼모로 삼은 정치공방이 벌어지는 토양이다. 이번에 ‘지옥 같은’ 법사위를 연출한 것은 결국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다. 법사위의 과반을 차지하는 ‘법 기술자’들이 정쟁을 기능적으로 뒷받침하며 돌격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0.06% 대 16.5%.’ 총인구 중 법조인 비율과 20대 국회에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49..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곳도 많고 기름진 고장도 많지만 이름으로 진주만 한 데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진주가 지도에서 빠진다면 참 쓸쓸하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진주 진양호 숲을 탐사했습니다. 이 고장 출신의 문인묵객이 허다하지만 그중에 잠깐이나마 직접 안면을 익혔던 한 시인이 유독 떠올랐습니다. 그이가 생전에 가꾸고 부린 말에는 이 진양호의 깊은 물빛과 수직 절벽의 아찔함이 다 들어 있겠다는 짐작도 함부로 해 보았습니다.진양호가 거느린 산은 얌전하고 납대대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물을 깊이 가둔 탓에 물 가까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많습니다. 한 발 삐끗하면 그냥 물의 나라로 입국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잠시 왔던 꽃들이 모두 저희의 나라로 입적하고 난 뒤의 스산한 시기에 이곳은 진주바위솔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