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400년 전 그리스 아테네. 한 청년이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정의(正義, justice)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받드는 것은 ‘정의 그 자체’가 아닙니다. 정의의 겉모습인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평판’과 그 평판에 수반되는 개인적 이득입니다.”청년은 플라톤의 작은형인 글라우콘, 노인은 소크라테스다. 청년은 노인에게 가르침을 달라며 말을 이어간다. “정의는 원래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생겨난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정의롭다는 평판을 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거나 다른 이의 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면 사람은 누구나 부정을 저지르려 합니다. 부정한 사람은 돈과 친구의 힘을 빌려 좋은 평판을 얻습니다. 부귀영화가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국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국정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정보공개법 1조에는 알 권리, 국정 참여, 투명성을 위해 이 법을 제정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 핵심요소들로 이 제도의 정착이 곧 민주주의 운영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시민들은 연간 100만건 이상의 정보공개를 청구하며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 행정안전부는 정보공개전문가, 시민과 함께 전국 577개 기관의 정보공개 실태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필자도 기초자치단체를 평가했고 그 과정에서 이 제도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기관을 보면서 크게 감동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와 공공기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정보공개 선진국으로 발돋움 중이다.최근, 이 제도에 브레이..
수도권 신도시로 조성된 도시가 30년이 되었으니 신도시라는 말이 무색해져 버렸다. ‘계획’과 ‘조성’이라는 낱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있는 신도시의 과거 풍경은 그야말로 인위적이었다. 허허벌판에 생뚱맞게 높이 치솟은 빌딩과 도시 중앙에 반듯하게 뻗은 도로 너머로 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신도시는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 사는 곳 같았다. 하지만 신도시 주민들은 한결같이 도시 중심에 큰 호수공원이 있고, 쇼핑센터가 곳곳에 있어 사람 살기 좋다고 했다. 그들의 일관된 주장도 한몫해서 타지 사람들은 신도시는 도시의 첨단이니 그곳의 삶도 첨단일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튼 수도권 1기 신도시의 문패는 전국 곳곳에 높은 빌딩과 아파트 단지를 갖춘 첨단 신도시 하나쯤 품게 된 지금은 빛이 바랬다. 실제로 ..
2009년 초 법무부가 ‘검사의 맹세’를 만든다며 지인을 통해 나에게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보수적인 이명박 정권이었지만 집권 초기여서 약간 기대감을 갖고 노력봉사를 했다. 취지가 좋은 데다 법조인이 아닌 일반인의 의견을 듣겠다고 하니 ‘검찰이 진짜 바뀌려나’ 했다. 외국 검찰제도와 국내외 문헌을 참고하고 기자 시절 검사들한테 받은 느낌도 포함해서 평소 생각하던 ‘바람직한 검찰상’을 ‘맹세’에 담아 보냈다. 다섯 가지 다짐을 열거했는데, 둘만 소개하면 이랬다. ‘나는 모든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임을 명심하여, 겸손하게 국민을 섬김으로써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 ‘나는 국가에 봉사할 뿐,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직무를 수행한다.’내용이 아주 좋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이 정치개혁 핵심으로 등장했다. 선거제도 개편에 따른 문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구를 갖고 있는 국회의원과 지역주민의 중요한 관심사다. 특히 21대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문제는 지역주민과 국회의원 후보자로 출마하려는 정치인에게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는 공직선거법 제24조 제11항에 따른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선거구 획정안 마련을 위해 정당 및 학계, 시민단체 등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현재 선거제도 개편의 기본적인 방향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어느 정도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일반 국민들은 국회의원 정수를 확대하는 데 부정적이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왜 국민이 정치인을 불신하고 있는지 정치..
‘어린이’는 1920년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시를 번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래 어린이날 선포, 월간 ‘어린이’ 발간 등을 통해 점차 일반화된 어휘이다. 근대 계몽운동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강조된 ‘소년’과 비교할 때, 어린이라는 말에는 윤리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어린이를 뜻하는 한자는 유(幼)이다. 한 가닥 실의 모양을 본뜬 요가 작다, 약하다 등의 뜻이고 여기에 역(力)을 더한 유(幼)는 힘이 약한 아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2500년 전에 나온 의 백성 양육 정책이 자유(慈幼)와 양로(養老)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연약한 존재인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幼)가 대개 노(老)와 함께 먼저 보호해야..
“지역구도 때문에 영남 대통령이 호남에 가면 구의원도 안되고, 호남의 대통령은 이 부산에 오면 구의원도 되지 않는 이런 정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 ‘정치 1번지’ 서울 종로를 던지고 부산에서 다시 도전에 나선 ‘바보 노무현’의 절절한 호소다. 배타적 지역주의 속에서 영남과 호남은 양대 정당에는 서로 ‘텃밭’과 ‘험지(險地)’로 교차됐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텃밭과 ‘대통령이 출마해도 구의원도 안되는’ 사지(死地) 지역구, 한국 정치의 오랜 질곡이다.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2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험지’ 대구 출마를 선언,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20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대선주자 반열로 부상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올여름에 나온 그의 새 저작 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이아몬드는 지식과 지식인의 사회학을 공부해온 내게 매우 이채로운 학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첫째, 그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공적 지식인’이다. 전문적 지식인이 지식사회 안에서 학술 연구로 주목받는 이들이라면, 공적 지식인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지적 담론을 펼쳐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말한다. 다이아몬드는 2005년 미국 ‘포린 폴리시’와 영국 ‘프로스펙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공적 지식인 가운데 아홉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둘째, 그는 생리학·지리학·인류학·역사학 등을 포괄하는 이른바 ‘빅 히스토리’의 문명학자다. 학문의 전문성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지식사회에서 그는 매우 특별한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