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뭘 기다리는지, 얼마의 시간인지, 그새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과가 희망적이든 아니든 기다림은 초조, 긴장, 불안, 공포의 경험이다. 2014년 2월 나는 서울관악고용노동지청에 있었다. 르노삼성자동차를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고평법)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하기 위해서다. 노동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일할 조건을 만들 책무는 사업주에게 법이 부여한 것이다. 고평법은 직장 내 성희롱 신고를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르노삼성자동차는 피해 증언 이후 피해자에 대해 사직 종용, 소문 유포와 조직적인 왕따 등 괴롭힘, 징계, 업무전환 등 부당한 처우는 물론 그를 도운 동료에게도 징계와 대기발령..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그 사람, 집에서는 가부장적이네. 젊을 때는 부모를, 결혼해서는 아내와 자녀를 힘들게 하면서도 당연한 줄만 아네. 자신은 밖에서 힘든 일 한다는 핑계로 차별에 둔감하네. 그러면서 성차별 말만 들으면 요즘 세상 좋아졌다면서 지금은 남자가 힘든 시대라고 하소연이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성차별에 반대한다는 그 사람, 학력주의는 찬성하네. 대학 이름은 사람의 성실함을 대변한다면서 주변 사람을 무안하게 하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나오면 공정하지 않다고 분노하네. 어쨌든 시험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에 공정한 것이라면서, 그 빌어먹을 노력을 동등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외면하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
정치하겠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어. 뭐하러 그 고생을 하나 싶었거든. 그러나 정치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잘 안된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듣고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라. “정치라는 게 짐승이 하는 거라고 쉽게 말하고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잖아요. 또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나마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치를 하려고요.”후배 K야. 정동길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 너의 강단 앞에서, 뭐랄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소낙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난 많이 지쳐 있었거든. 올 한 해 정치는 혐오와 불신 이외엔 달리..
최근 며칠간 ‘사과’와 관련된 국내외 뉴스가 보도됐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공적인 사과’들이다. 지난 5일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가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표했다. 지난 8월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에 이어 이날 광주 오월어머니집을 방문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뭐라도 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왔다”고 말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를 찾아 “어떤 말로도 이곳에서 비인격적인 처우를 받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많은 사람의 슬픔을 달랠 수 없을 것”이라고 사죄했다. 그는 앞서 지난달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구체적인 사건까지 말하며 잘못을 사과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내놓은 ..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학성(1961~)강물..
우리 출판사에서는 최근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이끌어갈 저자들이다. 너도나도 책을 내는 시대에 평범한 저자들의 등장은 그리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어떤 테마나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자기 삶의 고백, 자서전적인 글쓰기를 담게 될 것이다. 지난가을 출판사로 투고되어온 원고들 중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글 두 편이 있었다. 이들이 최근 연달아 책으로 나왔다. 출간을 결심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삶이 소설 한 권을 써도 좋을 만큼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랬다면 책을 내는 데 주저했을 수도 있다. 책을 내보지 않은 이들이라 판매나 인지도 측면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좋은 글에 이골이 난 눈으로 볼 때..
20대 정기국회를 마감할 본회의가 9·10일 문을 연다. 지난달 29일 자유한국당이 198개 법안에 무더기 신청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 대치가 풀리지 않은 채 정기국회도 100일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여느 해 할 것 없이 마지막 벼락치기를 반복한 정기국회지만, 올핸 사정이 더 긴박하다. 새해 예산안은 교섭단체 간 감액·증액 심사도 매듭짓지 못하고 법정 처리시한을 1주일이나 넘겼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검찰개혁법과 유치원 3법, 시급한 민생법안들, 해외파병 연장안·대체복무법 같은 외교안보 현안까지 줄지어 기다리는 본회의 안건만 200개가 넘는다. 그러나 하루 앞 8일까지도 국회에선 “의회정치 낙오자가 되지 마라”(민주당), “의회독재 길을 걷지 말라”(한국당)는 입씨름만 거듭됐다. 민주당..
MBC ‘검찰기자단’ 편이 방영된 이후, 중앙언론사들의 법조출입기자단이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에 따르면, 은 “법조기자의 취재 현실과는 거리가 먼 왜곡과 오류투성이”라고 한다.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즉각적인 사과와 정정보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말 유감이다.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는 패기가 유감스럽다.기자들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쓰는가? 오래된 언론학 교과서가 물었던 질문이다. 시대나 나라에 따라, 언론사에 따라, 기자에 따라 답이 다를 테니 위험한 일반화는 참기로 하자. 하지만 ‘일반 독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며 기사를 쓰는 기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조사에 의해 쉽게 확인된다. 기사 초고를 읽을 담당 차장이나 부장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답도 많았고, 경쟁사 기자가 생각난다는 답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