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회학과에서 문화사회학 같은 과목을 강의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현상의 다양한 맥락을 이론적 틀을 가지고 설명해주고, 되도록이면 개인들, 특히 소수자에 대한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함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의. 컴퓨터 코드와 그래프, 바둑판 모양의 표만 보는 수업의 한계는 분명하다.그럼에도 대학에서 통계와 통계프로그래밍을 가르치는 것은 흥미롭다. 수학을 싫어하거나 수학 때문에 고통받았던 학생들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학생들에게 이원 연립일차방정식, 일원 이차방정식과 근의 공식, 함수, 수열, 행렬 등 간단한 수학 문제를 진단 차원에서 낸다. 많은 학생들은 중학교 2학년..
남들은 송년회로 바쁘다던데, 연말 약속을 잡을 때마다 ‘집 보러 가야 한다’는 몇몇 친구의 사정에 자꾸만 약속이 미뤄진다. 또래 친구 무리에서 일주일 동안 3명이나 집을 계약했다. 단체카톡방에 한동안 부동산 관련 정보만 올라왔다. 자취했던 경험을 되살려 주워들은 정보를 나눴다. 유튜브, 블로그를 공유하기도 했다.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청년전세자금 대출은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다세대주택은 무엇이고 다가구주택은 무엇인지, 융자는 또 무엇인지. 글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끝까지 이해 못한다. 바이럴 광고도 넘쳐나는 시대다. 결국 믿을 것은 내가 만나고 교류해온 ‘믿을 만한’ 사람이다. 어떤 집을 피할지, 우리 법은 얼마나 세입자를 호구로 보는지, 2년 뒤 피눈물 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
손가락이 떨렸다. 한바탕 언성을 높인 직후였다. 떨리는 손가락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회의 전에 목소리를 높이지 말자고, 천천히 말하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엎질러진 물이 문제였다. 다시 주워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엎질러진 물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며칠 나를 괴롭혔다. 베갯머리가 젖는가 싶었는데 내 꿈속까지 축축해졌다. 잠꼬대까지 한 모양이다.여러 의견을 모아 책을 한 권 내야 했다. 내가 편집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여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만장일치를 바란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사안은 큰 의미가 없다고 믿는 편이다. 모두가 찬성하는 사안은 대개 변화와 무관한 안이한 사안일 경우가 많다. 나는 한두 가지 쟁..
12월10일 국회에서 내년 보건복지부 예산 82조5269억원이 확정되었다. 1960~1980년대 고도성장기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복지는 사회의 변화를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확대가 되었다. 2000년 이후, 기초생활보장 제도를 중심으로 공공부조가 강화되었으며, 최근에는 기초연금이나 아동수당 등 보편 복지사업이 도입되었다. 복지부 예산 역시 증가해왔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10.3%씩 확대가 되어 정부 전체 예산 증가율 5.8%를 웃돌았다. 정부 전체 예산 중 차지하는 비중도 2020년 16% 수준으로 부처 가운데 가장 높다. 가장 많은 예산을 지출하는 정부 기관의 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만든 예산이 국민 삶에 실질적인 도움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
도로는 폐쇄되었다. 수십년간 학생들과 장 보러 가는 마을사람과 봇짐 든 할머니를 실어 나르던 도로는 이제 버려졌다. 도로는 여전히 구불구불 길게 뻗어 있으나 닿을 곳이 없다. 어딘가 빠져나갈 곳을 향해 067 미니 마을버스가 급히 도망친다. 백경수를 떠나 금촌까지 가던 마을버스가 어쩌다 나타난 승객 앞에서 먼지를 피우며 멈춘다. 거울처럼 맑아 ‘백경수’라 불리던 그곳도 이제는 맑지 않다. 공장에서 나온 까무잡잡한 노동자 두엇이 발부리를 툭툭 차며 알 수 없는 말을 나눈다.고기를 얹어주던 길가의 국숫집은 이제 모닝 차에서 내린 젊은 가족을 환영할 수 없다. 뿌연 유리문 안에서 중늙은이 두엇이 막걸리를 붓는다. 길게 늘어선 손님들 앞에서 사철 김을 피워 올리던 찐빵만두집도 공장 밥집으로 바뀌었다. 유리공장,..
2018년 출산율이 0.98로 떨어졌다. 세계 최저출산율이고 출산율 1 이하는 세계 최초다. 통계청 장기인구추계(2015~2065년)에 의하면, 합계출산율 1.12를 가정할 경우 2065년 총인구는 3666만명으로 감소한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인구)는 2015년 3744만명에서 2065년 1700만명으로 크게 감소한다.이런 저출산은 경제성장률을 하락시키고 장차 대한민국을 소멸시키는 국가적 재앙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지난 13년간 153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것은 저출산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 총무청 장관을 지낸 마쓰다 히로야는 그의 저서 (2014)에서 도쿄로의 인구유출 특히 가임여성의 유출로 기초자치단체들..
독일어 ‘마이스터(meister)’는 경지에 이른 최고 전문가, 최고의 스승 등을 뜻한다. 라틴어 ‘magister(선생님)’가 어원으로, 영어의 ‘마스터(master)’, 이탈리아와 스페인어의 ‘마에스트로(maestro)’ 등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 인기 TV 드라마 에서 막강한 권위의 지휘자가 ‘강마에(마에스트로)’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영화 에서는 주인공이 대적들을 격퇴한 후 ‘마스터’라 불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이스터나 마스터, 마에스트로 등은 승용차나 신용카드, 신사복 등의 브랜드에도 장중한 이미지로 종종 이용된다. 독일축구 분데스리가의 우승 트로피 이름(마이스터 샬레)에도 마이스터가 들어간다.독일의 ‘마이스터 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직업훈련 체제이기도 하다. 중세 길드에서부터 이어진 ..
눈이 참느리게 내린다 초고속의 시대에 눈은빠르게 내려도참 느리게 내린다 어느 하루어느 성당에서 내려가던나무들 사이작은 길처럼 눈은 참느리게도… 눈 보고게으르다 하지 않으시니 부지런하다 하지 않으시니 눈은참 그대로 내린다.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그대로 내린다… 임선기(1968~)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성당 아래로 작은 길이 나목들 사이를 내려오듯이 고요하고 느리게. 참으로 느리게. 이 초고속의 시대에 아마도 제일 더딘 속도로. 그러나 제 속도로. 게으르거나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없는 제 본래의 속도로. 눈송이는 내리면서 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드문드문 말도 걸면서, 질서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 밑동처럼 희고 시원한 생김새로, 차가운 절벽의 하늘을 참 느릿느릿하게, 제 속도로 내려온다. 이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