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출판평론가 표정훈씨가 유길준 의 ‘서(西)’를 ‘서(書)’로 바꾸어 ‘서유견문(書遊見聞)’을 하자고 썼던 글을 기억한다. 그가 말한 ‘서유’란 바로 책을 찾아 떠나는 서점기행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을 낸 뒤, 중국 서점기행을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 솔깃했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초 ‘한겨레21’을 들추다가 박현숙 자유기고가가 연재하는 ‘중국 서점기행’을 읽게 됐다. 연재는 윈난성 리장에서 시작해 상하이, 톈진, 쑤저우, 베이징 등 중국 전역을 돌며 이어지고 있다. 20년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자신의 중국 체험을 녹여내어 특색 있는 서점들을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베이징의 서점만 해도 대여섯개나 된다. 그의 서점기행을 읽으면서 ‘..
우리는 종종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함정에 빠진다. 그래서 편협한 시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결정하는 실수를 범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 관련 전시회를 가보면 우리의 1970~1980년대 분위기로 전시장을 조성한 걸 볼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북한에 대한 편견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북한 하면 떠올리는 것이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 때 모습에 멈춰 있다. 지난해 여름부터 중국 20~30대 사이에서 북한의 한 여성 가이드가 관심을 받고 있다. ‘纪片我去看世界’(다큐멘터리 세계를 가다: 세계 일주를 하며 여행하는 콘셉트의 채널)라는 채널을 운영하며 유튜브는 물론 중국의 유명 동영상 플랫폼인 웨이보, 유쿠, 아이치이에 업로드된 중국인 여행팀의 영상에 출연하는 여성이다. ..
어린이 책을 쓰고 싶다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가장 본받고 싶은 작가로 권정생 작가를 꼽았다. 초등학교 때 을 읽은 감동이 잊히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듣고는 오랜만에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둔 책을 꺼냈다. 딸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던 숱한 밤들과 딸애가 책에 낙서를 하고는 빙글빙글 웃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과거에 딸한테 읽어주며 코끝이 시큰했던 바로 그 장면에서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이제 보니 은 ‘순수’나 ‘동심’ 같은 세상이 뻔히 바라는 걸 담은 동화가 아니었다. 우스운 얘기에 종종 등장하는 똥이 웃기는 것인 줄로만 아는 세상에 똥도 울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가장 하찮은 것이 세상의 뿌리가 된다는 작가의 목소리는 조용하나 과격하다. 욕망이 쉽게 탐욕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작가는 멀찌..
시작이 있었기에 끝이 있다. 당연한 이치다. 해는 떠올랐기에 지고, 달은 차올랐기에 기운다. 새해를 맞이했던 아침이 있었기에 송년의 밤도 온다. 한 해를 보내는 분위기를 돋우는 노래로 ‘올드 랭 사인’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겐 ‘석별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더 친숙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은 ‘오랜 옛날부터(old long since)’라는 뜻을 지닌 스코틀랜드 말이라고 한다. 한때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기도 했기에 한국인에게 ‘올드 랭 사인’ 멜로디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묘하게도 그 친근한 멜로디를 작곡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1788년 어떤 노인이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공공재정 부정청구에 대한 환수와 제재에 관한 일반법인 ‘공공재정 부정청구 금지 및 부정이익 환수 등에 관한 법률’이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복지 수요 확대 등으로 인한 공공재정 지출은 매년 증가하고 있고, 이에 따라 그간 정부의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종 보조금이나 지원금 등에 대한 부정청구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국민권익위원회가 현행 법률(1446개, 2018년 4월 기준)을 전수조사한 결과, 공공재정 지급 근거가 있는 법률 913개 중 환수 규정이 있는 법률은 138개(15.1%)에 불과하고, 제재부가금 부과 등 징벌적 제재 유사 규정이 있는 법률은 단 21개(2.3%)에 불과했다. 약 6만5000개로 추산되는 조례 등 자치법규에 근거하여 지원되는 공공재정지급금도 마찬가지다.따라서 ..
이맘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그믐날 뜨는 해와 설날 뜨는 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구획을 지어 떠들썩하게 의미를 부여해온 데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태를 훌훌 떨쳐버리고 새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6세기 시인 노수신은 연말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지은 시에서 “어지러운 잡념들이 꼬리 물고 일어나니, 가볍게 다스려 조장도 망각도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번잡해지는 마음을 무겁게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안정을 이룰 수 없는 법, 조바심에 일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되 그렇다고 손 놓고 방기해서도 안된다는 맹자의 말을 송구영신의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송구영신의 때에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
장발장은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의 주인공 이름이다.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사회에 나와 또다시 절도한 장발장이 무조건적인 용서와 신뢰를 보내준 미리엘 주교에게 감화받아 본인과 주변의 삶을 변화시킨 얘기는 초등학생들도 알 만큼 유명하다. 한데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의 에서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발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작가는 등장인물 모두를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팡틴, 부모 없이 장발장 손에 맡겨진 코제트, 혁명에 뛰어든 마리우스, 코제트를 인신매매하려는 여인숙 부부, 장발장을 추격하는 형사 자베르 등 고통받고, 고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작가에겐 ‘불쌍한 사람들’이었다.위고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2010년대가 저물어간다. 10년 단위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다소 편의적이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막 지나가고 있는 2010년대라는 ‘디케이드(decade)’에 대한 기억과 성찰은 사회변동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사회학자들에겐 의미 있는 일이다.지구적 차원에서 2010년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가 진행돼온 시기였다. 대침체 시기의 사회변동은 2017년 ‘거대한 후퇴’로 명명됐다. 거대한 후퇴란 세계 질서가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형국을 지칭한다. 거대한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였다.먼저 위기의 신자유주의는 불평등 강화와 사회통합 약화로 나타났다. 감세·규제완화·유연화를 추구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