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일하며 가장 뿌듯한 순간은 문제가 해결될 때입니다. 복잡한 문제들이 기사 한 번 썼다고 풀리진 않지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니까요.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뿌듯함보다는 아쉬움과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제게 가장 아프게 남아 있는 ‘결국 도움이 되지 못한 기사’를 꼽아봤습니다. 지난 7월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 박동운씨, 박미심씨, 허현씨를 만났습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조작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이들은 재심에서 무죄가 밝혀졌지만, 박근혜 정부가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범위를 크게 좁히는 법논리를 만들어내며 손해배상에서 제외됐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 판결이 잘못됐다고 결정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도 박씨 가족에게 배상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교수신문이 해마다 선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에 공명지조(共命之鳥)가 뽑혔다. 공명조는 불교 우화에 등장하는 한 몸에 머리가 두 개인 새로, 한쪽 머리가 혼자 늘 맛있는 열매를 챙겨 먹자 질투심을 느낀 나머지 하나의 머리가 독이 든 열매를 몰래 먹고 결국 죽고 말았다고 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개체가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눈앞의 자기 이익만 좇다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과 검찰의 수사 태도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세력 등으로 양분된 것을 걱정한 결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올해 추천된 상위 5개 사자성어 간 경쟁이 유독 치열했다는 점이다. ‘가짜와 진짜가 마구 뒤섞여 있다’는 어목혼주(魚目混珠·29%)도 1위와 별 차이 없는 지지를 받았다. 뒤이어..
코밑의 수염도 어쩌지 못하는데 저 멀리 늘 떠오르는 해를 어쩔 수 있겠는가. 혁명은커녕 벽지도 못 바꾸고 달력사냥이나 하는 연말이다. 굴뚝으로 들어가는 산타처럼 기해년도 쫄깃하게 수렴되어 이제 그 어떤 잘록한 구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지난주에는 산으로 가던 길을 끊고 삼청동의 사진전으로 갔다. “산속도 속세를 벗어난 선경이요, 도시도 속세 안의 선경”임을 카메라로 포착해내는 이갑철의 “적막강산, 도시징후”. 꽃산행에 나서 우리 강산을 돌아다니면 마음이 한움큼 뽑혀 나갈 때가 있다. 꽃보러 나왔다가 자연의 사정에 마음을 홀랑 빼앗기는 순간이다. 하늘과 산이 연출하는 ‘저절로 그러함’을 목격하고도 놓친 것을 뒤늦게 줍는 느낌과 함께 내 늑골 안쪽의 골짜기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는 듯하다.한 바가지의 적..
지난 11월25일 발표된 통계청의 2019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노력을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2.7%로 10년 전보다 14.9%나 떨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특성화고 직업교육 업그레이드를 통한 계층 이동성 제고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특성화고에는 일반고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이 많이 진학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대로 된 직업교육을 통하여 취업 역량을 갖추고 이를 디딤돌로 하여 맹자께서 말씀하신 항산(恒産)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주요한 책무라고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직업교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지겠다면서 다양한 일·학습 병행제 및 선취업 후진학 관련 프로그램들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일반고에 비해 직업교육을 수행하는..
글을 다 쓰고 나면 처음부터 훑어보며 접속사를 지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따라서’와 같은 말들을 최대한 덜어낸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관계를 섣불리 확정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나는 그 사이의 접속사를 뺀다. 두 문장들의 상호작용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지만 어떤 행간은 비워둘수록 더욱 정확해진다. 특히 ‘그러나’와 ‘하지만’처럼 앞에 오는 내용을 역접(逆接)하는 접속사를 남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문장이 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컵라면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이 경우 나는 ‘그러나’를 빼는 방향으로 문장을 수정한다. 앞문장과 뒷문..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내신시험이라고 한다. 학기마다 두 번의 시험 때가 되면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서 시험공부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원들에서는 시험이 시작되기 3주 전부터 ‘시험대비기간’을 설정하고 각 학교별 시험문제 출제 유형에 맞춘 예상문제 풀이를 집중적으로 지도해왔다. 그런데 그 기간이 최근 들어서 4주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1개월 전부터 시험 대비를 하는 학원이 대다수가 되었다. 요즘 학원들은 대부분 단과반이다.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과목이 수학이고 영어와 국어가 주요과목으로 운영된다. 학원들마다 경쟁력을 갖고 중요하게 운영되는 과목이 다르다보니, 시험기간이 되면 각 과목마다 성적이 잘 나올 수 있도록 예상문제를 학생들에게 넘치도록 건네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 풀어오도록 압박한다. ..
평소 고까운 직장상사를 한창 욕하고 있는데 “누구 얘기들 해?” 그 상사가 불쑥 얼굴 들이밀면 전부 ‘으악!’ 식겁합니다. 호랑이를 마주친대도 이보다 간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이 성립되는 상황입니다. 만약 재수 없는 사람 이야기였다면 ‘까마귀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눈빛으로 쉬쉬했겠지요. 같은 자리에서 비슷하게 쓰이는 속담으로 ‘양반은 못 된다’ 또는 ‘양반 되기는 텄다’가 있습니다. ‘호랑이’가 윗사람이라면, ‘양반’은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이가 뒷말의 대상입니다. “이보게들! 그 양반, 국자로 뺨 맞은 얘기 혹시들 아는가?” “어느 양반 말인가?” “누구긴, 거 살구나무집 그 양반이지.” “아아, 그 양반! 이번엔 또 무슨 수작질 하다 그리됐다던가?” “그 양..
적폐청산에 동원된 대표적 범죄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다. 국정농단과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기소된 이가 전직 대통령과 사법부 수장을 포함해 십 수 명에 이른다. 사실 직권남용죄는 기소건수나 유죄가 인정된 사례가 적다는 점에서 잊혀진 범죄유형이다. 기소도 2~3%에 불과하고 유죄판결을 받는 공무원도 거의 없었다. 과거 정권교체기마다 반짝 등장한 적이 있지만 이번 적폐수사처럼 검찰이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지는 않았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이 서슬 퍼런 칼날을 세웠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본격화되면서 직권남용죄의 고소·고발이 폭증했다. 연평균 5000~6000건에 불과하던 고소·고발 건수는 2017년 들어 9741건, 지난해에만 1만4345건을 기록했다.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