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안톤 슈나크의 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문장이다.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슬퍼지는 것은 나 역시 언젠가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굶주린 세월을 살지는 않았으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울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쟁을 겪지 않았으니 충격적인 공포와 상실로 인해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비견할 만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이 없지 않으나 대개는 아주 사소한 이유, 어린아이들의 별것 아닌 다툼, 터무니없는 서운함, 사소한 소외와 사소한 외로움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슬픔이 그 나이의 그 아이에게는 세상 전부와 맞바꿀 만큼 거대한 비통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슬픔과 고독은 평균치..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면서 집을 지어주고 용돈과 차비도 줬는데, 묵은 기름때와 독극물, 소각장은 그대로 두고 떠난다. 주인은 남은 쓰레기와 시설을 자기 돈으로 직접 치운다. 심지어 원래 살던 식구들을 쫓아내면서 여의도 5.5배 면적의 집을 지어주고 이사비 16조원도 기꺼이 지불했다.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한 지난 75년 동안, 한국 정부는 단 한 차례도 미국에 오염된 미군기지 정화 책임과 비용을 받아낸 적이 없다. 미국은 ‘한국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누구나 알고 있는, 환경정책의 기본원칙인 ‘오염자부담원칙’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내 토양환경보전법은 “그 오염을 발생시킨 자는 그 피해를 배상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등의 조치를 하여야..
소송제도 일부를 개선하자고 만든 위원회에 어느 법과대학 교수가 외부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간사의 브리핑이 끝나자 그 교수가 물었다. “그래서, 이 제도로 국민에게는 어떤 혜택이 돌아간다는 겁니까?”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발언이 좀 생뚱맞다 싶었고 솔직히 듣기 싫었다. 그 기억은 변호사로서 법정의 운영 실태를 보면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개선이든 개혁이든 관청에서 하는 일은 그 신선함이 국민에게 피부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지난 10월 초 한겨레신문 강희철 기자가 쓴 기사에는 판사들이 김명수 대법원장을 ‘어대’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어쩌다 대법원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새로 공무원이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선거캠프 등에 있다가 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이라..
우리 국토의 83%는 농산어촌이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20%가 채 되지 않는다. 65세 이상 어르신 비율은 농가 45%, 어가 36%, 임가 42%로 우리나라 전체 고령인구 비율(14%)보다 3배 정도 높다. 생활 서비스는 물론 의료, 복지, 교육 등 사회서비스도 도시에 비해 부족한 실정이다. 반면 복지수요는 지역별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고민에서 사회적경제가 출발했다. 취약계층의 고용, 돌봄 등 공동의 이익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경제적 활동이 사회적경제다.충북 산골의 한 사회적기업은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가 참여하는 목공, 도예, 제과·제빵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 활동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 간의 소통이 더욱 활발해졌을 뿐 아니라 지역 내 교육공동체로도 발전했다. 그동안 대중교통..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시골 병원에서는 연로한 분에게 전신 마취가 더 무서운 거라며 수술보다는 약해진 무릎을 잘 달래어 활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권했다.가족은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잘못될 수 있지만 움직이실 수 있어야 하니 수술하자는 파와 이제 활동적인 삶보다는 조용히 사시더라도 노후를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파로 나뉘었다. 가족의 의견은 어머니의 의지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나뭇잎이었다. 그냥 걱정을 날려버리고 수술을 택했다. “죽더라도, 살게 된다면, 걸어야지”라고 띄엄띄엄 이어지는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에 실린 뜻이 강했다. 서울에 사는 막내로서 나는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간혹 찾아뵈어도 재롱이나 피우다 오는 처지였다.다행히 수술 후 회복하시는 중이..
지난 11월 한 날에 경향신문 1면은 사람들의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1200명의 이름. 세월호의 이름들 다음으로, 이름 하나하나를 읽게 만든 지면이었다. 종이 신문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지면이라고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이런 일이 아니고서는 이제 종이 신문을 보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빠르게 바뀌어 가는 것이 종이 신문뿐일 리 없지만, 거기에 빼곡하게 들어찬 이름들은 정작 바뀌어야만 했을 어떤 것이 바뀌지 못했다는 걸 목숨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얼마 전 다나카 쇼조라는 인물에 관한 책을 펴냈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 20세기 초 메이지 시..
한 해의 끝에서눈이 두 번 내린 후에누군가 여행을 제안했을 때겨울 들녘이 바람의 손을 잡는 걸 봤다 남포 들을 적시기 위한김제 성덕의 방죽 물이사람을 먹일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 것까지보고 나니겨울 들판에서 여름 숲을 예비하는그분의 사계를 만날 수 있었다 한 해를 여밀 기운을 비로소 얻어여행자끼리 나누는 술잔에지난 시간의 독기를 담가 씻고새날에 새 잔을 건넬 수 있었다. 장재선(1966~)한 해가 끝나가는 때에 시인은 김제로 겨울 여행을 가서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들판을 보고, 성덕 방죽의 길을 걷는다. 눈이 두 번이나 내린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새봄에 들녘을 적실 방죽의 물이 생명을 기르고 있는 것을 본다. 겨울이 봄과 여름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 겨울과 봄이 마디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초여름의 날씨가 무더웠다. 나는 매일 수레를 빌려 취영당(聚瀛堂)에 가서 답답함을 풀었다. 갓을 벗고 의자에 앉아 내키는 대로 책을 뽑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때때로 오류거(五柳居)에 들러 도생(陶生·서점 주인)과 이야기했다.’ 1801년 연행 사절로 베이징을 찾은 유득공은 거의 매일 유리창을 찾았다. 취영당·오류거는 그의 발길이 오래 머문 책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책을 읽거나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나 대화했다. 유득공에게 유리창은 책과 지식인을 만나는 ‘문화의 창’이었다. 그는 1790년 1차 연행 때도 유리창을 방문했다. 유득공은 에 유리창 방문기를 실었는데, 이 글은 뒷날 에 재수록됐다. 유득공뿐 아니었다. 연행사로 중국에 간 조선의 학자들은 어김없이 유리창을 방문했다. 홍대용은 그곳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