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을 어슬렁거리다보면 간혹 술빵과 마주치게 된다. 예전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빵의 투박함은 사라지고 대신 강낭콩이니 푸른 완두콩이니 하는 고명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와 있다. 고무 함지박에 밀가루를 넣고 어머니는 막걸리와 사카린 혹은 그것을 가루 낸 당원 녹인 물을 약간 섞어 반죽을 빚었던 것 같다. 아랫목에 한동안 놔둬 빵빵해진 밀가루 반죽을 서둘러 쪄낸 술빵은 어릴 적 자주 새참거리로 등장해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나선 내게도 얼마간의 몫이 돌아왔다.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술빵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점은 익히 짐작이 간다. 이름값 하듯 술빵에선 약하긴 하지만 막걸리 향이 난다. 그렇다곤 해도 부풀린 밀가루 반죽으로 술빵을 만드는 주역은 막걸리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효모(yeas..
조선 말 제주의 유학자 김양수는 감귤을 재배하던 제주 과원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촉감과 당유자 모두 다 숲을 이루어/ 섬나라 농사 밭에 가을빛이 깊어졌네/ 일찍이 꽃필 때는 하얀 눈을 뿜어내는 듯하더니/ 잠깐 새 얽혀진 가지에 황금덩이 녹아 부었네.”제주도에는 많은 품종의 감귤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온 충암 김정은 에 아홉 종의 귤과 유자를 설명했다. 9월에 익는 금귤, 10월 그믐께 익는 유감·동정귤을 언급하면서 금귤과 유감은 알이 좀 크고 매우 달며 동정귤은 알이 작지만 맛이 시원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청귤, 산귤, 감자, 유자, 당유자, 왜귤 등을 말하고 으뜸은 청귤이라고 했다. “(청귤) 묵은 열매는 달기가 꿀에 섞은 것 같다”고 했다. 정조 때 제주목사..
많은 시민들이 휴일을 만끽하던 25일,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는 여느 때처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교통관제탑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25m 높이의 철탑 아래에서는 또 다른 삼성 해고노동자 이재용씨가 천막을 치고 지지농성을 벌였다. 시민들은 농성 현장에서 삼성 해고노동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성탄절, 서울 강남 한복판의 풍경이다.김용희씨는 지난 6월10일 철탑에 올라 26일 고공농성 200일을 맞았다. 김씨는 1991년 삼성항공에서 노조 설립을 주도하다 해고됐다. 해고 무효 확인소송을 벌이며 3년 뒤 복직했으나 1년 만에 다시 쫓겨났다. 이재용씨는 1997년 삼성중공업에서 해고됐다. 두 사람은 모두 만 60세로 농성의 와중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러나 삼성으로부터 불법 해고에 대한 사과와 복직을 받아내지..
대통령과 시·도지사가 모여 지방자치와 균형발전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제2 국무회의’가 제도화된다. 행정안전부는 이런 내용의 ‘중앙지방협력회의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24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협력회의는 대통령이 의장을, 국무총리와 시·도지사협의회장이 공동부의장을 맡고 17개 시·도지사 전원이 참여한다. 경제부총리, 사회부총리, 행안부 장관 등 주요 중앙행정기관장과 지방협의체 회장들도 정식 구성원이 된다. 대통령과 지방의 수장이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협의체가 마련된 건 반갑고 환영할 일이다. 그동안 대통령 주재 시·도지사 간담회는 가뭄에 콩 나듯 비정기적으로 열려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5차례 있었고, 박근혜 정부 때는 임기 내내 세 번뿐이었다. 한번씩 돌아가며 얘..
“술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 했던가.가족여행으로 바닷가 경치 좋은 숙소에 모여 유쾌한 저녁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신선한 해산물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져 행복감에 빠져들 즈음, 동생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심장에 박혔다. “누나는 늘 이성적인 사람이잖아.”평소라면 웃고 넘어갈 말이었다. 동생의 성품을 알기에 비꼬거나 공격이 아니란 것도 알았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집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역할을 맡아 온 구성원이고, 그로 인해 신뢰를 얻고도 있다. 한데 그날은 왜 그토록 마음이 아팠던 것인지. 가족 간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다. 괜히 서러워 혼자 울었다. 분명 술 탓이었다.초등학생 무렵 엄마는 자주 아프셨다. 동생들과 나이 차가 크다 보..
※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5년 전 개봉한 과 지난달 개봉한 는 모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다. 엘사와 안나의 자매애를 부각하고, 눈사람 올라프가 코미디를 담당하고, ‘렛 잇 고’나 ‘인투 디 언노운’처럼 많은 이들이 자동적으로 흥얼거릴 만한 주제곡이 있다.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악당의 유무’다. 전편에는 권력에 눈이 멀어 사랑을 위장한 왕자가 악당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속편에는 이렇다 할 악당이 없다. 거대하고 힘센 바위거인은 딱히 악의를 가진 듯 보이진 않는다. 엘사의 할아버지인 아렌델의 루나드 왕이 자연 친화적인 노덜드라족을 절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악당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회상 속에만 등장한다.에서 굳이 악당을 꼽자면, 루나드 왕이 남긴 제국주의..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아이는 공방에서 아크릴화를 그리고 있는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 살이라는 아이는 낯선 사람에게도 선선히 말을 잘했다. 그런데 누군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하자 아이는 대답 없이 걸머메고 있던 가방을 끌어내려 연습장과 연필을 꺼냈다. 그러고는 연습장을 펼쳐 꼬불꼬불한 선을 긋고 그 위에 집 모양의 그림을 그렸다.“우리는 지금 여기 있고, 이렇게 가면 우리 학교예요.”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우리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따라갔다. 어른들은 예상하지 못한 아이의 친절함에 모두 웃었는데, 아이가 선뜻 학교 이름을 대지 않고 약도까지 그려 내보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학생 수가 적은 대안학교라서 이름을 말해주면 학교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아이는 아예 다음 질문까지..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으로 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불교의 경전 ‘보왕삼매경(寶王三昧經)’의 첫 구절이다. 학설이 분분하지만, 중국 명나라 때 고승 묘협(妙협)이 지은 중 일부라고 한다. 이 삼매경은 같은 운율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의 번잡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보답을 바라지 마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고 하지 마라.바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