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사 계단을 올라가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연탄불에 타는 밤 껍질 냄새. 지상에 올라서고 보니 역시나 군밤 할머니가 있었다. 옆에는 김밥과 바람떡 아주머니. 그 옆에는 양말과 이태리타월 할아버지. 아 이 익숙한 조합. 오 이 정겨운 가락. “김밥이요 김밥, 금방 만든 김밥이요, 맛있는 김밥 있어요, 김밥 드세요 김밥.” 수년 전 이곳을 지날 때도 딱 이 조합 이 가락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군밤화덕이 지금의 군밤화덕인지, 그때의 가락 주인이 지금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군밤 할머니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짐짓 속으로 알은척을 했다. “저 할머니는 늙지도 않으시네”라고.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나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내 할머니는..
내가 여성으로서 경험한 차별을 처음으로 쏟아내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혼잣말로 입안에 머물던 감정들이 우르르 말이 되어 쏟아졌다. 불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편하냐고 아무도 물어주지 않아서 말할 수 없었구나.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자 비로소 내 이야기가 의미를 갖게 됐다. 맞은편 동료가 맞장구치고 분석도 하며 거들었다. 자신이 겪은 경험도 나눠준다. “나만 겪은 게 아니었어.” 안도와 든든함은 용기가 되었다. 밤새 이어졌던 그날의 ‘수다’는 나를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끌었다. 말할 수 있는 장소와 동료는 싸울 수 있는 힘과 언어를 가지도록 응원해준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인내, 극복 등 개인의 영역이었던 차별은 사회의 과제가 된다.“차별받은 경험을 나눠 주세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에 맞서는 용기를..
“황석어젓도 준비했음^^.” 내가 답신을 하지 않자 후배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문자였다. 후배는 지난여름부터 올해 김장을 자기 집에서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요즘 누가 김장을 집에서 하느냐며 한쪽 귀로 흘렸다. 게다가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 원고 마감일이었다. 그런데 저 한마디에 마음이 동했다. 황석어젓이라. 나는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다. 미식가도 아니고 대식가도 아니다. 그런데 유독 젓갈 앞에서는 흔들린다.결국 원고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차를 몰아 강화대교를 건넜다. 후배는 강화 토박이가 아니다. 10여년 전, 귀촌 비슷하게 강화로 들어가 주경야독하고 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시간을 쪼개 지역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힘을 보태기도 한다. 몸집이 큰 데다 얼..
2002년 12월18일 오후 9시 뉴스.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가 깨졌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당시 나는 노무현 캠프에서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실무자였다. 그전까지 우리는 2% 차의 신승을 예상했다. 자정 무렵 2% 차의 신승 예측을 유지한 채, 마지막 보고서를 전달했다. 실망하여 투표장에 가지 않을 유권자의 규모와 위기의식을 느끼고 결집하는 유권자의 규모가 비슷할 것으로 보았다. 결국 2.3% 차이로 이겼다. 2016년 총선. 선거전문가들은 민주당 100석 미만, 새누리당 150석 이상으로 점쳤다. 나는 민주당이 120석을 얻을 것으로 보았지만, 정작 언론 인터뷰에선 100석으로 예측하고 말았다. 총선 이후, 나는 망했고 민주당은 이겼다.# 쏠림 현상은 없다.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받는 사..
“출애굽기 21장 7절이 허용하듯이 전 제 막내딸을 노예로 팔 의향이 있어요. 딸아이는 조지타운대 2학년이고,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자기 순서가 되면 항상 식탁을 말끔히 치우죠. (노예로 파는 데) 괜찮은 값은 얼마입니까?”미국 드라마 시즌2 에피소드3 ‘중간선거’편에서 대통령 제드 바틀렛이 극우 인사인 제이콥스에게 한 말이다. 제이콥스는,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불렀다는 바틀렛의 지적을 듣자 “제가 아니라 성경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불렀다”고 말한다. 작가 애런 소킨은 바틀렛 입을 빌려 현대에서 폐기된 구약의 여러 규범을 예로 들며 제이콥스를 통박한다. 동성결혼 합법화(2017년) 17년 전 다뤄진 에피소드다. 오래전 미드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최근 김진태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지난..
지난 10월 홍콩의 반정부 시위대에 악인 캐릭터인 조커의 가면이 등장했다. 복면착용 금지에 시민들이 조커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홍콩 당국을 조롱하는 의미다. 홍콩뿐 아니라 레바논, 이라크, 칠레, 스페인 등의 반정부 시위에서도 등장했다. 홍콩에서는 고담시티와 같은 현실에, 이라크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 산유량 2위 국가인데도 민생고를 겪는 데 반발하며 가면을 들었다. 영화 를 만든 토드 필립스 감독의 말처럼 ‘현실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공감능력 부족’이 조커 가면을 쓰게 한 것이다.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불안에 말로만 공감하는지 모른다. 미래를 고민하는 청춘들과의 상담내용을 실었다고 하는 에세이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호응하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고통을 참고 견디라’는 ..
마저 말하려는데왜 목메는지 목메는데 왜말은 역류하는지 말을 물고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밤 밤이 바람을 뱉는다구름이 반달을 뱉는다 반달이 절반만 말한다해에게 빌린 말 빛 없는 말은달 뒤편에 있다 윤병무(1966~) 말을 뱉기도 하고 삼키기도 한다. 절반은 발설하고 절반은 억지로 참는다. 마치 반달이 반쯤만 빛을 뱉듯이. 달의 앞쪽과 뒤편이 있듯이. 빛과 어둠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의존하듯이.삼키고 참은 말은 기다리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에도 내심(內心)이 있다. 발화하지 않은 말의 속마음을 알기는 참 어렵지만, 상대방의 사정이나 형편을 어림잡아 헤아리면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좋은 이해는 일어난 것의 그 너머를 보는 것일 테다. 별똥이 떨어진, 산등성이 너머를 가늠하듯이. 시인은 시 ‘달 이불’에..
변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국제관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최근 우리는 그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한·미관계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한·미동맹은 냉전적 안보상황의 산물이다.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한·미동맹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새로운 안보상황에 직면하고 있다.일본의 수출통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처리과정에서 드러난 일본 편향적 태도, 그리고 주한미군 주둔비용 6조원을 요구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이런 미국의 태도 변화는 한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중 패권경쟁에 직면한 미국은 우리보다 먼저 한·미동맹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