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정리에 들어간 지 한 달째다. 목표는 예닐곱 평 방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남기고 버리는 것. 언제든 어디로든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출해지면 더욱 좋고. 그런데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짐가방은 몇 개나 될까. 오래전 중국 보따리상들 쫓아다닐 때나, 식당에 필요한 물품들을 스페인에서 사다 나를 적에, 메고 지고 끌고 다니던 게 최대 다섯 개였으니, 여기저기 처박아둔 트렁크를 찾아보니 마침 다섯 개가 나왔으니, 그래 가방 다섯 개의 짐만 가지고 살아보자 싶었다. 물론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되는 계산이었다. 그리하여 여하튼 목표는 방 하나. 챙긴 짐만큼 공간은 좁아질 것이고, 버린 짐만큼 몸이 가벼워질 것이니. 반드시 달성하고야 말겠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제일 먼저 한 일은 한쪽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는 ..
1 대 99냐, 20 대 80이냐의 논의와 관련해서 20 대 80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0 대 60 대 20의 사회이다. 밑에 있는 20%는 지금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기 어렵고, 중간의 60%는 추락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사회가 되었다.유일한 해법은 ‘계층 상승의 사다리’라는 허구를 버리고, 든든한 마룻바닥을 까는 것이다. 기본소득, 기본주거 같은 과감한 해법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더 이상 불가능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배당, 농민수당 등 대한민국에서도 현금으로 지급되는 급여가 늘어나고 있다. 좀 더 큰 시각으로 정책을 설계하면, 기본소득은 충분히 가능하다. 쓸데없이 도로 닦고, 건물 짓고, 전시성 사업에 쓰는 예산 낭비만 줄여도 불가능..
아직도 세계는 광물자원 전쟁 중이다. 지난 세기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화석원료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자원 확보 전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화석원료를 소비하면서 산업과 사회를 성장시켜 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환경오염 및 기후변화와 연결되어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요인으로 평가된다.세계 각국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등 그린에너지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저유가 속에서도 2차전지, 전기차,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등에 이르는 그린에너지 관련 시장의 성장기조는 견고하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넘어설 대표적인 고성장 신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래에셋대우증권에 따르면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규모는 지난해 15조..
1987년 유엔의 환경과 개발을 위한 세계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늘어나는 인구와 에너지 사용 때문에 환경에 부담을 많이 주기 시작한 시점에 뭔가 절묘한 해법을 제시한 것 같은 이 말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문, 방송, 잡지를 가리지 않고 해설이 잇달았고 너도나도 설명과 방안을 내놓았다. 나도, 덩달아 잘난 체하면서 세미나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말을 곧잘 인용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을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협안이었다.고백하자면, 처음부터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이 가진 형용모순이 껄끄러웠다. 변화를 필수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개발 앞에 변화에 거스르는 형용사가 붙은 말은 궁여지책..
정치가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그간 민주주의 이론은 보완되고 수정되어왔지만, 현실 반영은 묘연하다.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지방자치는 아직도 낮은 수준에서 시행되고 있다. 정치가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인식은 늘었지만,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는 일도 요원하다. 나는 정치권에서 주로 정책·선거조사를 담당했었는데, 정치가 국민을 대표해야 한다는 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내 머리엔 어떻게 하면 정치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서가 없었다. 국민과 정치, 그 중간에 존재하는 넓은 공간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에 관한 문제의식조차 깊지 않았다. 엉킨 실타래를 풀다 지치면, 여론에 편승하거나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국민만을 바라보고 ..
볼리비아 우유니의 소금사막은 4년 전 남미여행을 떠날 때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봤던 파란 하늘, 흰 구름이 데칼코마니처럼 고스란히 물 위에 반사된 장면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했다.수도 라파스에서 출발하는 밤 버스를 타고 우유니에 새벽 5시30분쯤 도착했다. 그 작은 도시에 한국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보통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거나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정말 재밌거나 하면, 그곳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우유니는 특유의 몽환적인 풍경과 함께, 일종의 액티비티 경지에 오른 ‘인생샷 건지기’ 덕분에 한국인이 가장 꿈꾸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됐다.우유니 소금사막은 아주 먼 옛날 바다가 지각변..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새로 드러나는 모양들.눈이 부시다,어두워 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신경림(1935~) 때마다 끝맺음이 있다. 일몰도, 계절의 끝도, 한 해의 바뀜도 우리가 겪는 끝맺음의 때이다. 물론 일생의 해 질 녘도 있다. 연만하여 일생의 석양을 마주할 때가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이 해가 질 무렵이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대한 것이 오히려 지워지고 작고 소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잘것없어 보이던 것이 곧 꽃이요, 길이요, 노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리라.보잘것없는 것은 아무것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행복은 알 수 없는 것일까.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자 학자들은 행복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성장을 강조하는 주류 경제학은 소득과 행복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개인소득과 행복도의 관계를 조사한 경제사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소득이 늘면 개인은 행복하지만,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해서 국민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행복은 더 이상 소득순이 아니다. 부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탄은 1인당 소득이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반면 행복지수는 2016년 부탄 세계 1위, 한국 96위였다(유엔 행복보고서). 부탄의 행복 척도는 국내총생산(GDP)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