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조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영상 자막에 쓸 ‘서체’를 사달란다. 학급 행사가 있을 때면 담임선생님의 부탁으로 활동사진을 편집해 동영상을 만드는 조카는 개인 채널을 운영하며 구독자 60여명을 거느린 크리에이터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상 편집 기술은 유 선생님에게 배웠다.공간민들레에 다니는 학교 밖 청소년들은 이맘때면 일 년의 활동을 정리해 자기만의 책을 만든다. 책 디자인 툴을 잘 다룰 줄 아는 아이가 있기에 어떻게 익혔느냐 물으니 이 친구도 유 선생님에게 배웠단다. 기타를 잘 치는 아이도,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도, 빵을 잘 만드는 아이도 어김없이 유 선생님의 제자다.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유 선생은 바로 유튜브다.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학습 방식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음을 ..
부모와 자식 고슴도치가 살았습니다. 자식 고슴도치는 제 가시 잠재울 줄 몰라 감정 불편하면 가시부터 세웠습니다. 그러면 부모 고슴도치가 다가와 자식의 가시를 핥고 쓰다듬어 잠재우려 했습니다. 자식 고슴도치는 그게 싫어 다가온 부모를 더 가시 세워 바짝 찔렀지요. 찔려도, 그래도, 부모 고슴도치는 더 다가갔답니다.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어머니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쓰시던 폰이 보여 그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저와 어머니 사이에 오간 대화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추억과 슬픔으로 하나씩 읽어 가는데 흐름에 이가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폰 꺼내서 대조했더니 세상에! 어머니는 제가 성내고 골내며 짜증으로 보낸 말들은 다 지워버리고 좋아서 착하게 보낸 말들만 ..
스포츠 국가 대항전 중 가장 주목도가 높은 것은 역시 한·일전이다.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12를 취재하던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도 누가 일본전 선발투수로 등판하느냐였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본전 선발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기자들은 공 잘 던지기로 이름난 투수들을 유력 후보로 꼽아가며 추리에 열을 올렸다. 대회가 하루하루 진행되던 어느날 문득 한 투수가 홀연히 기자들 사이에서 일본전 선발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누가 봐도 뜻밖이었던 스무 살의 신예였다.혹시나 했던 일은 일어났다. 2020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대표팀이 일본전 선발로 이 젊은 투수를 낙점한 것이다. 베테랑 투수가 등판할 것이라 추측했던 한국 기자들과 일본 대표팀..
심산유곡은 아니지만 ‘심’ 자로 시작하는 심학산 아래 웅크리고 지내면 뜻밖의 일을 겪기도 한다. 새벽 3시에라야 새벽 3시의 생각은 찾아오는 것. 북으로 가던 철새가 고도를 낮추어 퉁소를 연주하는 심야 음악회도 있다. 그렇게 몇 밤을 건넌 뒤 서울로 나오면 어디 먼 고대(古代)로부터 외출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 도시는 부황하고 아찔하다. 그제는 몇 가지 볼일을 몰아서 서울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가야 했다. 따뜻한 곳만 따뜻하고 추운 곳은 아주 추운 서울. 무려 20층짜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행사에 참석한 뒤 사기접시 속의 점심을 먹고 옛날 궁리출판의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름으로 가는 징검다리처럼 의젓한 인왕산.서촌의 통인시장 근처 길담서원에 들렀다. 오래전 마음이 허할 때, 이 벽의 책들을 다 ..
2004년 국회는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새해 예산안을 가까스로 처리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여권의 ‘4대 개혁 입법’을 예산안과 연계시켜 반대하면서 처리가 늦어졌다. 예산안이 ‘새해’ 하루 전인 세밑에 처리된 것은 1961년 이후 처음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해를 넘기지는 않은 마지노선이 무너진 건, 최악의 여야 관계였던 2013년도 예산안 처리 때다. 당시 새해 예산안은 세밑 처리가 유력했으나 막판에 제주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해를 넘겨 1월1일 오전 6시에 처리됐다. 1960년 헌법에 준예산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새 회계연도 개시일을 넘긴 것이다. ‘처음’만 어려웠던 것일까. 2014년도 예산안은 또다시 자정을 넘겨 1월1일 오전 5시쯤 국회 문턱을 넘었다.헌법이 정한 예산안 법정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