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갈 때마다 ‘굴기’의 눈부신 속도와 또 그 그늘에 놀란다. 지난여름 중국 동북 지역 답사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간 젊은 연구자들은 시간 날 때마다 샤오미 매장에 들렀다. 거기에는 휴대폰, 노트북 같은 최신형 기본 컴퓨팅 기기들은 물론 AI를 적용한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IT 기기들이 많았다. 중국의 산업 혁신 전반이 그렇듯 샤오미도 다른 나라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이제 그 수준은 세계 최고에 이른 것이다. 그런 혁신 자체가 매혹적인 힘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그 힘이 중국의 그늘 즉 빈부 격차, 민주주의의 부족, 검열과 감시, 패권주의적 충동 같은 것을 넘고 보편적인 새로운 가치와 접속할 수 있을까? 그런데 홍콩 시위 과정에서 바로 그 샤오미 매장이 공격 대상이 됐다..
키스 재럿이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있다. 어떤 경로로 그의 음악을 접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다만 ‘쾰른 콘서트’라는 제목의 즉흥연주를 처음 들은 순간은 기억난다. 졸업을 한 한기 앞두고 휴학 중이던 여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한남역에서 전철 들어오길 기다리던 저녁이었다.스물셋의 나는 다른 건 몰랐고 이 두 가지만 알았다. 사법시험만큼은 싫다는 것과, 사회운동가로 성장할 그릇도 못 된다는 것. 세상을 바꾸려는 막연한 이상으로 학생회 언저리에 머물렀지만 힘을 보태주고 싶던 이들에게 되레 짐이 됐음을 수학기 지내고야 자각했다. 그 시간 동안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놓고 전공이 안 맞는다고 단정지었다. 입시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언어영역을 가르치며, 좋아하는 기형도 시에 밑줄 쫙 그으면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아세안 10개국 정상이 26일 부산 벡스코에서 이틀간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마치고 ‘평화·번영과 동반자 관계를 위한 한·아세안 공동 비전성명’과 ‘공동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정상들은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고 향후 한·아세안 협력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정상들은 역내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는 한편 보호무역주의 반대 기조를 확인하고 한·아세안 양측 간 교역과 투자를 활성화하기로 약속했다. 한·아세안 정상들의 미래 비전을 제시한 ‘부산선언’의 의의와 향후 이의 실천을 주목한다.1989년 ‘부분적 대화 파트너’로 시작한 한·아세안 관계는 지난 3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양측 간 교역은 20배, 투자는 70배, 인적교류는 40배 이상 늘었다. 한국 국민의 제1..
검찰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뇌물수수·수뢰후부정처사·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 때문이다. 2017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재직 당시 건설업체와 자산운영사 등으로부터 차량을 비롯한 각종 편의와 자녀 유학비를 포함해 모두 5000만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속 여부, 죄의 유무와는 별개로 그에 대한 청와대 감찰 과정에서 “현 정권 실세의 부당한 압력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큰 문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이 2017년 10월 유 전 부시장에 대한 비리 첩보를 입수했는데 누군가의 압력을 받고 2개월 만에 돌연 감찰을 중단하고 별다른 징계를 하지 않았다는 의혹이다. 유 전 부시장은 청와대 감찰 이후에도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오른 선거법 개정안이 27일 국회 본회의에 자동 부의((附議)된다. 국회의장은 ‘부의 후 60일 이내’에 법안을 상정할 수 있다. 부의는 곧 본회의 처리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과 검경수사권 조정법이 다음달 3일 부의되면 패스트트랙 법안들을 일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20대 마지막 정기국회는 내달 10일 폐회된다. 결국 내달 3일부터 10일 사이에 본회의에서 표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불어민주당은 아무리 늦어도 내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는 12월17일까지는 선거법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고 사실상 시한을 제시한 상태다. 이렇게 데드라인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지만, 여야는 한 치 양보 없는 강 대 강..
이응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사대천왕’이다. 1910년을 전후해 태어난 이들은 독자적인 조형 언어와 기법으로 한국의 미감을 형상화했다. 한국 현대미술은 이들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태호 미술평론가가 (세창)에서 화가의 삶과 작품을 분석해 박수근(1914~1965)과 이중섭(1916~1956), 이응노(1904~1989)와 김환기(1913~1974)를 각각 라이벌로 설정한 것은 흥미롭다.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민의 고단한 삶을 화폭에 담았다. 박수근이 화강석 같은 질감으로 이웃의 삶을 포착했다면(‘소녀’ ‘빨래터’), 이중섭은 격정적인 감성으로 가족과 시대상을 표현했다(‘황소’ ‘길 떠나는 가족’). 이응노와 김환기는 한국..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발표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이라는 짧은 글은 이 역사적 사건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역사는 드디어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미 있었지만 지금 세계는 냉전시기보다 더 복잡해졌고 그 해법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그마저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현재 너무나 다양하게 혼재하는 ‘정체성’과 이의 인정을 둘러싼 갈등을 그 요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제일주의’를 내세우고 등장한 트럼프의 미국 정체성이야말로 후쿠야마가 주장했던 역사의 종말을 분명하게 반증한 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세안과의 관계가 ‘신남방정책’으로 다시 호명됐다. 25~26일 개최되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향후 신남방정책을 가속화하는 동력이 될 전망이다. 1989년 한국과 아세안은 대화의 물꼬를 텄고,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탈냉전’의 흐름과 함께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에도 온기가 불어온 것이다. 그간 제한적으로 이뤄지던 아세안 국가와의 교류에도 점차 활기가 돌았다. 다수의 한국 기업이 아세안 국가로 이전해 생산의 세계화 흐름을 따랐고, 신흥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아세안의 유학생과 이주민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국은 자본 수출과 생산설비 수출, 문화 수출국으로 아세안 앞에 서게 되었고, 아세안은 한류 소비자이자 유학생, 노동자, 결혼 이민자로 다가오게 되었다. 아세안은 우리 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