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겨울이 몹시 추웠다. 빨간 내복 위에 털실로 짠 바지를 껴입고 눈 쌓인 골목을 휩쓸고 다니다 보면 바지 밑단에 얼음이 엉겨 붙어 뻣뻣해졌다. 그때 골목길은 대개 흙바닥이라서 겨우내 꽝꽝 얼어붙었다가 날이 좀 풀린다 싶으면 쌓여 있던 눈과 함께 녹아 곤죽이 되곤 했다. 이제 집 밖으로 나서면 시멘트 바닥에 아스팔트가 짱짱하게 깔려 있어 실감하지 못하지만, 땅도 겨울에는 강물처럼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리밭은 이른 봄이면 겨우내 들뜬 겉흙을 눌러주고, 보리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보리밟기를 한다. 밟아줘야 잘 자라며, 웃자라지 않도록 제때 밟아야 하는 것은 보리의 생장이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번 청년은 얼마 전 꽤 좋은 학원 강사 자리를 얻었다..
2020년은 대학의 위기가 전 방위적으로 가속화되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이 남긴 후유증은 결국 ‘대학의 종말’이라 할 만한 단계로까지 진행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들이 국공립, 사립, 수도권, 지방 할 것 없이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학 등록금은 동결되었고 인구절벽으로 2021년부터 대학 입학자원 역시 25%가 모자란다는 현실도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계 대학들은 당장 다음 달 교직원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학의 기초학문인 교양교육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실용 학문에 가려 정체성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대학들은 학술성이나 보편성이 없는 교과목들, 일회..
2014년 4월의 잔인한 그날이 정신없이 지나고 다음날 보고가 왔다. 계열사 직원의 아이가 그 배에 탔다는 소식이었다. 무작정 진도에 내려갔다. 눈에 띄는 게 조심스러워서 작은 차를 하나 구해 타고 조용히 실종자 가족이 머무는 체육관 근처에 가서 전화를 했다.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 292번째로 아이는 두 달 만에 부모에게 돌아왔다. 그 잔인했던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상처 받은 유가족을 향해 비난하거나 비아냥을 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가끔씩 그 아빠인 직원도 TV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소속 계열사 대표를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아빠가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 하도록 내버려두라” 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 연말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으면서 마..
는 과 더불어 TV에서 틀어줄 때마다 보는 영화다.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를 발견하면 하려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보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본 횟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번은 넘을 것이다. 선도부 소속으로,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일진인 이종혁 패거리는 학교를 쏘다니면서 일반 학생들을 괴롭힌다. 그 폭력에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인, 그래서 싸움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권상우는 이들에 맞서려고 기회를 엿본다. 이종혁 패거리가 자기네 반에서 행패를 부릴 때, 권상우는 그쪽을 향해 빈 도시락통을 집어 던진다.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중간부터 봐도 괜찮은 이유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옥상 싸움 장면이 맨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이다. 권상우가 쌍절곤과 태권..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했다. 불과 6개월 만에 마스터플랜을 수립했고 5년도 지나지 않아서 사업을 완료했다. 강바닥을 팠고 보로 막았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강을 살린다고 한다. 맞다. 살려야 한다. 강을 죽인 사람들도, 강을 살리겠다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 강을 모른다. 강은 콘크리트가 아니다. 생물이다. 물도 살아있고 강바닥도 살아 움직인다. 손을 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강이, 강바닥의 모래가 마음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가들이, 학자들이, 강에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이, 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를 없애면 농사를 못 짓는다고 주장한다. 틀렸다. 4대강 준설 때문에 수위가 낮아져서 농사를 못 짓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모래를 강에서 파냈기 때문이다. 보만 열고 파헤쳐진 강바닥은..
한국 사립대학 등록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다. ‘2019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비회원국 9개국 포함, 46개국 대상 조사에서 2018학년도 한국 사립대학의 연평균 등록금(학부 기준)은 8760달러로, 4위였다. 그나마 2016학년도 3위, 이전엔 오랫동안 2위를 지키던 것에 비하면 다소 낮아진 것이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등록금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정부가 2009년 반값등록금 정책을 추진하며 오랫동안 꽁꽁 묶었는데도 여전히 높다. 지난달 실시된 등록금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90%가 넘는 응답자가 등록금이 “매우 부담” 또는 “약간 부담된다”고 했다. 대학생 36%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거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많은 돈을 들여 대학에 갈 필요성은..
2020년 올해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사망한 지 100년이 된다. “우리는 그에 필적할 정도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베버의 묘비명이다. 베버가 갖는 생명력의 원천은 정치·경제에서 종교·문화까지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에 있다. 베버 사후 베버에 맞설 수 있는, 박식함과 심오함을 모두 갖춘 사회사상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짧은 칼럼에서 베버의 학문적 성취를 모두 다루긴 어렵다. 오늘 내가 주목하려는 건 그가 남긴 정치적 통찰이다. 베버는 1917년 11월 뮌헨대학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 초청으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강연했다. 1919년 1월 다시 초청받았는데, 이때 맡은 강연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였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그동안 탐구..
시를 쓰는 선배 교수님이 계시다. 어디에 발표하거나 게재하는 건 아니고 나를 포함해 가까운 직장 동료를 비롯한 지인에게만 회람하게 하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학생을 인솔하여 해외교육봉사 가서 겪은 에피소드 등 주로 학교 일과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각운이 딱딱 들어맞고 수미상관의 형식미가 철저했다. 공대 모범생이 교양국어 수업에서 작성한 과제물 느낌이랄까. 혹은 ‘오늘 날씨, 맑음’으로 시작하여 ‘참 재미있었다’로 맺는, 소년이 연필로 반듯하게 적어내린 방학일기 같다고 할까. 읽는 내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지만 나보다 한참 손위인 분께 “시가 귀엽습니다”라고 평할 용기는 나지 않아,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도로 예의 바르게 호응하곤 했다. 지난 늦겨울이었다. 카톡 알림음과 함께 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