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훈련소 퇴소식에 다녀왔다. 할머니는 손자 먹이겠다고 불고기를 재우고 김치를 새로 담그고 불고기 불판에 가스버너까지 챙겨왔고, 엄마는 자식 좋아하는 잡채며 나물이며 전을 지지고 무치고 볶느라 잠을 설쳤으며, 한 송이에 몇 만원 한다는 포도를 비롯해 온갖 과일에 평소 즐겨 먹던 과자에 라면까지 완벽준비. 여기에 조카를 끔찍이 여기는 고모는 전날 사다 놓은 딸기생크림 케이크가 어쩐지 미진해 보여, 마감을 코앞에 둔 와중에도 자판을 두들기다가 틈틈이 주방으로 가 토마토스튜를 젓고 있으니, 이게 웬 수선이고 난리고 법석이냐 싶기도 했지만, 군대 간 자식 생각하는 마음표현에 먹을거리 말고 다른 게 없었으므로, 논산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뭐 더 가지고 갈 만한 게 없을까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었..
2019년엔 일가족의 사망이 유독 많았다. 1월 서울 중랑구 모녀의 죽음, 8월 관악구 모자의 아사, 9월 강서구의 부양의무자에 의한 일가족 살해와 자살, 성북구와 인천 일가족의 사망 소식이 있었다. 이들 가족은 빈곤의 수렁에서, 소득 중단이나 부채 위기에 맞닥트렸을 때 죽음으로 내몰렸다. 보건복지부는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사각지대를 조기 발견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빈곤층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질문을 외면했다. 왜 한국의 가족은 ‘함께’ 죽는가.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빈곤율은 17%로 38개국 가운데 다섯 번째로 높다. 노인 빈곤율은 43%로 모든 국가 중 가장 높고, 아동·청소년 빈곤율은 14%로 전체 빈곤율에 비해 다소 낮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
한 사회는 의외로 소리 없이 크게 실패할 때가 있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혹은 다른 소란 때문에 중요한 실패가 지각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실패를 더욱 큰 실패로 만든다. 실패했는지도 모르는 실패, 아니 그 이전에 어떤 시도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실패, 아니 그 이전의 이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서 어떻게 되든 상관도 없었던 실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런 실패들 중 하나다.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미안’과 ‘민폐’에서 시작한다. 설요한이라는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지난해 말에 동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 민폐만 끼쳤다.” 그는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였다. 중증장애인을 동료로서 지원한다는 것은 그도 중증장애인이라는 뜻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정부가 시범 실시한 ‘중증..
며칠 전 서울 목동에 대규모 재건축이 가능해졌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목동 집값 훈풍”이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는 그 소식을 환영하는 지역주민들의 반응을 전했다. 재건축 규모는 84㎡의 주택 5100가구가 추가로 공급되는 수준이다. 그 지역은 7년 전 교통 혼잡과 학급 과밀을 발생시킨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행복주택’이 무산되었던 바로 그곳이다. 소유한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일까? 법 앞에선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러한가?2013년 행복주택 공청회장에서 자신을 목동 주민이라 밝힌 한 사람은 “청년들이 (행복주택에) 입주해서 내 자식을 때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라고 소리쳤다. 목동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행복주택의 취지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목동은 ..
1987년 대통령직선제 이후, 22번의 선거가 있었다. 현재 집권당인 민주당의 국민 총득표수 기준 성적은 22전 5승17패. 정치전문가들이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다. 한 시즌을 책임져야 하는 선발투수의 성적이었다면 다음해, 마운드에 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 선수의 예상성적을 예측하는 시스템도 예전엔 선수의 모든 기록을 사용하다 실패했다. 지금은 예측에 최적화된 기간과 모형을 찾았고, 최근 2~3년의 기록만 사용한다. 따라해봤다. 22번의 선거결과를 놓고, 올해 총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특정 기간을 찾았다. 2012년 총선부터 2018년 지방선거까지 6번의 선거결과가 가장 적합하게 분석됐다. 그 과정에서 올해 총선을 전망하는 데, 몇 가지 특징을 찾았다.첫째, 1987년부터 2..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정호승(1950~)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정호승 시인의 시에 대해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이 주제의 울타리를 고집스럽게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 시에서의 ‘꽃’은 한 명의 사람(어머니) 혹은 생명일 수도 있고, 사랑의 의지일 수도 있고,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일 수도..
백범(김구) 우남(이승만) 해공(신익희) 인촌(김성수) 유석(조병옥) 죽산(조봉암) 해위(윤보선)…. 1960년대까지는 거물 정치인들은 아호(雅號)로 불렸다. 이름을 부르는 건 불경으로 여겨, 품위도 있고 예우의 뜻이 담긴 아호로 통칭된 것이다.1970년대 들어 영문 이니셜 호칭이 등장했다. 원조는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이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애칭 ‘JFK’를 원용해 ‘JP’라는 약칭이 만들어졌다. DJ(김대중)·YS(김영삼) 등장은 결을 달리한다. 독재 시절 탄압받는 인물을 부르는 은어로 시작해 국민적 열망을 담은 애칭으로 자리잡았다. ‘3김’을 거치면서 이니셜로 불리는 것 자체가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정치’를 상징하게 된다.‘3김 이후’ 대선주자들은 끊임없이 영문 약칭의 호명을 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2일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확진환자가 3명 추가로 발생해 국내 환자가 총 15명으로 늘었다. 추가 환자 가운데 1명은 지난달 31일 귀국한 교민이다.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감염된 사례도 처음 발생했다. 이 환자는 국내에서 부인에게 바이러스를 옮겨 두번째 3차 감염 사례로 기록됐다. 감염자가 중국 우한 입국자에서 기타 외국 감염자 및 국내 접촉자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날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범부처 대책회의를 열어 최근 14일 이내 중국 후베이성을 방문하거나 체류한 적이 있는 모든 외국인의 한국 입국을 4일부터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또 제주도의 무사증 입국도 당분간 중지하기로 했다. 현시점에서는 적절한 대응이라고 평가한다.가장 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