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고 며칠 뒤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통증 때문에 걷기 힘들었고 계단에서는 한 발씩 옮겨야만 했다. 무릎 아픈 건 실은 오랜 지병이다. 테니스를 좋아해 과하게 운동했던 탓인지 18년 전 처음 탈이 났고, 고만고만하다 나빠지더니 결국 이 지경까지 왔다. 한번 망가지면 고치기 힘드니 부디 아껴 쓰라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귓전으로 흘리고 함부로 쓴 결과다. 돌이켜보니 내가 병을 키웠다. 재작년엔 무릎 안 좋은 사람이 허벅지 근육을 키우겠다며 8층까지 매일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작년엔 다이어트를 한다며 날마다 1만보 이상을 일부러 걸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내 몸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에 집착했던 어리석음이 키운 병이다. 수술이든 물리적 치료든 전문가에게 맡겨 고쳐야 할 일이지만, 내가 스..
대학 마지막 학기를 보낼 때 다세대주택 반지하에서 살았다. 고시원 등지를 전전하다 월세로 들어갔다. 부엌이 딸린 방이라 밥을 지어먹어 좋았다. 작은 가구에 비디오비전도 들여놓아 즐거웠다. 친구들과 술 마실 공간이 생겨 신났다. 시험 기간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들어와 자곤 했다.습기 같은 건 대수롭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면 복도로 물이 들어와 차곤 했지만, 부엌까지 들어오진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내세울 일도,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타지로 와 일하고, 공부하던 이들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에서 살았다. 한강을 조망하는 오피스텔에 살던 친구를 부러워하진 않았다. 그때 내 욕망의 크기는 같은 다세대주택 옥탑방으로 이사하는 정도였다.24년 전 내 주거 형태를 떠올린 건 영화 의 기택네 반..
병상(病床)의 아침, 창밖에 눈발이 날립니다 병상에 누워 바라보는 바깥세상 한순간, 첫눈이구나 첫눈이구나 마음은 설레이고 육신의 고통은 사라져 창밖에 날리는 눈송이를 따라 나는 춤추는 인형스스로 창턱에 올라서서 눈에 보이는 세상 이 계절의 풍경 앞에 희열의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박이도(1938~) 병석에 누워 지내던 시인은 창 바깥에 흰 눈발이 흩날리는 것을 본다. 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잘고 가늘게 내리는 눈을 본다. 그 순간 공중에서 춤추는 눈송이처럼 마음이 들떠 두근거리고 흥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아파서 병상에 있지만 살아있는 이 순간이 고맙고 기뻐 눈물을 흘린다.어제 수선화가 겨울의 두꺼운 땅을 뚫고 뾰족하게 화살촉처럼 솟는 것을 보았다. 꽃나무가 꽃망울을 맺은 것을 보았다..
‘빅맥지수(Big Mac index)’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회사 맥도날드의 대표 햄버거인 빅맥(Big Mac)을 기준으로 세계 각국의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지수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데, 맥도날드가 전 세계에 진출해 있고, 빅맥이 표준화돼 있어 품질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기본 전제다. 맥도날드는 지난해 기준 120개 국가에서 3만7000여개 매장, 한국엔 400여개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빅맥지수 1위는 스위스(6.71달러), 2위 노르웨이(5.97달러), 3위 미국(5.67달러)이었다. 한국은 17위(3.89달러)였고, 일본 26위(3.54달러), 멕시코 42위(2.66달러) 등이었다. 표준화된 비교가 가능하니 최저시급으로 빅맥을 몇 개..
좋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나면 어떤 문장이나 장면이 오래 남기 마련이다. 남아서 간직되었다가 문득 떠올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서늘한 반성이 되기도 하고,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기도 한다. 혼자 잘 웃고 혼자 잘 놀라는 나는 툭하면 그런다.영화 의 한 장면을 가끔 떠올릴 때가 있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야. 모두가 넘어지지”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다. 모두가 넘어질 뿐 아니라 계속해서 넘어지게 되기도 할 터인데, 그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장면, 혹은 이 대사는 위로가 되는 여운을 남긴다. 넘어지겠으나 일어날 것이고, 또 넘어지겠으나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에서 넘어지는 일이란 마냥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같지만은 않아서 어떤 좌절은 그것 자체로 한 사람의 인생..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지난 2월7일 입학을 포기했다. 여자대학이라는 공간에 트랜스젠더 여성의 진입이 비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혐오와 극심한 반대 속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당사자에게 학교 생활이라는 ‘일상’은 싸우고 지켜야 하는 ‘현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발달장애학생의 특정 행동이 불안하고 위협적이어서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겹친다. 비장애학생의 교육권이 침해당하고, 안전이 위협당한다는 주장과 장애학생의 정당한 교육권을 박탈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 여론과 교육기관은 권리 간 충돌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만 강조했다. 이러한 현실은 상대방을 탓하며 피해의 강도를 다투게 만들어 구조적인 한계를 바로 짚기 어렵게 한다..
전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가 문제를 일으킨 데 이어, 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이런저런 리스트가 있다고 시비가 일자, 공무원들 사이에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죄, 무서워서 아무 일도 안 하면 직무유기죄’라는 탄식이 돌았다는데, 과장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걱정스럽긴 했다. 어디까지가 남용이고 어디서부터는 남용이 아닌가. 공무원이 권한을 행사하여 남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남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 직권남용죄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겉으로는 권한 내의 행위 같지만 실은 의도가 불순한 행위를 말한다. 권한 밖의 행위는 직권남용죄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세무공무원이 세무조사를 나가 몸수색을 하면 직권남용죄가 아니라 불법수색죄가 된다.일전에 대법원이 김기춘 등의 직권남용죄에 관해 내린..
올해 초 이라는 책을 번역, 출간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펼쳐진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다룬 로 유명한 수전 팔루디의 2016년 작품이다. 이 책은 팔루디가 3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최근 태국으로 건너가 성별재지정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아버지 스테파니의 커밍아웃을 납득할 수 없었던 팔루디는 그를 만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팔루디가 대면하게 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2020년 대한민국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온갖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란제리를 입고 앞섶을 여미지 않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