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초여름, 중국 복건성 북부에 위치한 무이산 구곡계에 갔었다. 죽벌을 타고 구곡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기도 했으며, 천유봉에 올라 뱀처럼 구불거리는 물길과 조화롭게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들을 즐겼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그곳에 간 까닭은 주희(1130~1200)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사람은 서하객으로 널리 알려진 서홍조(1586~1641)였다. 2011년 가을에 가 완역되어 출간되었고 그때는 내가 큰 수술을 마치고 정양을 할 때였다. 두어 달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무료했던 시간에 그 책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꿈을 키웠으니 내게는 그 어떤 신약보다 좋은 약과 같은 책이었다. 3년 후, 몸이 안정을 되찾자 대뜸 서홍조가 남긴 유기 중 후반부 3분의 1을 차지하는 운남..
몇 년 전 평등과 공평의 차이를 설명하는 그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돌며 공감을 얻었다. 세 사람이 담 너머로 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키가 담 높이보다 큰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같은 높이의 받침대에 올라서니 두 사람은 경기를 관람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경기를 볼 수 없다. 받침대 없이도 경기를 볼 수 있는 사람 대신 키가 가장 작은 사람에게 받침대 두 개를 받쳐주니 비로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이 그림 하나로 많은 사람이 공평의 의미를 쉽게 받아들였다.프랑스에서 친구가 위의 그림에 한 컷이 더해진 그림을 보내왔다.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경기를 관람하고, 다른 이는 그가 마실 음료와 간식을 받쳐 들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를 풍자한 눈살을 찌푸리..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림책이니까.” 책읽기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께서 집 주소를 여쭤보더니 엊그제 책을 한 권 부치셨다. 선생님 친구분이 펴냈는데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 1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어서 여기저기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포를 열어보니 유현미 작가의 그림책 (도서출판 가지)였다. ‘지구를 닮은 얼씨 드로잉(Earthy Drawing)’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가 낯설어서 프로필부터 살폈더니 미술치료를 공부하다 우연찮게 그림에 빠졌다고 한다. 작가는 구순인 아버지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함께 그림책을 만들고 촛불집회를 기록한 그림책도 펴냈다. 개인전과 원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작가는 머리말에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로 태어난다”라고 썼다. 그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작가의..
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유독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스물다섯 살의 도혜가 쓴 글이다. 아직 한 번도 알바를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도혜였다. 도혜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그의 친구 윤이는 달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이미 여러 알바를 해본 아이였다. 그들의 동네가 관광지로 뜨기 시작하여 곳..
고등학교 입학식이 다가오자 새 출발을 앞둔 아이들 표정에 희비가 드러난다. 가고 싶은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러지 못하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복이 마음에 안 든다, 건물이 낡았다 등 아이들 입에서 투정 섞인 소리가 새어 나온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모양이다.요즘은 어느 고등학교에 가느냐가 어느 대학에 갈지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등학교가 대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대학입시에서 수시모집이 확대되며 학생부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수시모집은 학생, 학부모, 학교가 함께 뛰는 3인4각 경기다. 아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부모와 학교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하지만 부모와 학교가 기대 이상의 지원을 해주면 아이는 자기 실력 이상의 결과..
“악법도 법이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에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라고 쓴 내용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한 말처럼 와전된 것이다.2004년 헌법재판소도 일부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며 독약을 먹었다”는 내용은 준법사례로 연결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내용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억압적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악법은 참으며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싸워서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한편 일상에서 “얼마전 주차위반 벌금을 물었다”처럼 ‘벌금’을 잘못 쓰는 사례가 많..
평소라면 나들이객들이 오갔을 일요일 한낮 덕수궁 돌담길에 인적이 드물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로에도 차가 별로 없어 퇴근 시간이 15분 가까이 단축됐다. 코로나19의 확진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도시의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사람들의 일상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났다.스포츠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정규시즌 막바지에 접어든 프로배구는 순위싸움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교통 접근성이 좋은 서울 장충체육관의 경우에는 평일에도 좌석이 매진된 것은 물론이고 입석 관중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로 팬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나 프로배구는 25일부터 무기한 무관중 경기를 시행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서 관중을 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여자프로농구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시즌 개막..
철원이라고 하면 곧장 쌀밥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한탄강, 겨울에는 두루미의 고장이다. 나의 경우 그 사이에 절 이름 하나가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얼음 트레킹,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관찰 등 몇 번의 철원 여행에서 백마고지, 노동당사는 둘러보았지만 그 아름답다는 절을 이정표에서 확인하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고대산 지나서 철원의 경계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절이라는 곳은 저물 무렵에 가야 더욱 특별한 맛이 나는 법이다. 철원에서 저녁을 맞이했으니 방향은 딱 한 곳으로 정해졌다. 길 위에서의 바쁜 마음을 추슬러 이번에는 곧장 그 절로 들이닥쳤다.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아담한 절이 바로 나타났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통일신라 경문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