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를 여러 번 간 적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과 병원이 있다. 한센병은 지금은 치료법도 발견되어 있어서 치료만 하면 낫는 병이고, 병균 자체도 감염이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둥병이라고 알려진 한센병은 우리가 어릴 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어른들은 문둥이가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어린애들을 잡아서 간을 빼먹는다고 했다. 그런 편견은 증오를 낳았고, 그 증오는 문둥이들을 동네에서도 살 수 없게 쫓아냈다. 쫓겨난 문둥이들은 남도 땅 멀리 격리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소록도병원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인권침해는 해방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독한 편견 속에서 그들이 살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 이 병에 대한 유전을 막는다고 단종수술과 낙태수술까지 자행되었다. ..
20대 국회 막바지에 어렵사리 검경 수사권 조정을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및 검찰청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검찰의 힘 빼기나 경찰의 힘 실어주기가 아니다. 국가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실이다.그런데 견제와 균형이라는 면에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외형을 보면 엇길로 들어설까봐 걱정된다. 독점적 수사와 정보나 규모의 면 모두에서 경찰이 마치 거대 공룡과도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2만 경찰이 정보독점에 수사독점까지 절대권력화되기에 이르렀다.문제는 운용 여하에 따라 과거의 경찰국가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해방 이후 지금까지 70여년간 수사권 조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았음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모..
지난해 휴가 때 앙코르와트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유적을 둘러보다가 문득 허망해졌다. 붓끝을 가볍게 놀리듯 돌에서 깎아낸 무희와 불상들을 촘촘히 새겨넣은 이 거대한 석조 도시를 크메르인들은 왜 기껏 지어놓고 버린 것일까. 수백년 수령의 나무뿌리들이 거대한 뱀처럼 한때의 찬란함을 조용히 집어삼키는 폐허 앞에서 무기력한 호기심이 떠올랐다.역설적이지만 이 석조 도시가 원인이라는 학설이 있다. ‘광란의 토목공사’로 국력을 소진했다는 것이다. 1181년 집권한 자야바르만 7세는 베트남 참족에게 점령됐던 앙코르와트를 되찾은 뒤 계획도시 앙코르톰 공사를 시작했다. 1변에 3㎞에 달하는데, 선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지은 동서 1.5㎞ 규모인 앙코르와트의 2배다. 이외에도 반테이끄데이를 비롯한 불교 사원과 50개의 탑에 2..
미국 미생물학회 주관으로 열린 생물위협(Biothreats)이라는 주제의 학회에 지난주 참석했다. 생명체로 인한 안전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전 세계에서 모였다. 이들은 우한에서 시작되어 WHO 비상사태 선포와 국제적 방역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nCoV2019) 호흡기 질병이 향후 인류에게 인플루엔자 독감처럼 일상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스, 메르스에 이어 발생한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높아졌지만, 치사율이 현저히 낮아진 것도 서로 공존하며 진화하는 관계로 볼 수 있기에, 질병의 일상화 쪽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 중심의 생태계 변화가 진행될수록 인류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염병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
메뚜기의 한철 출몰처럼 사이클이 매우 짧은 영화판에서 점점 더할 나위가 없는 새로운 경지를 밟아가는 이 개봉하기 전 공개한 시놉시스를 보면서 카프카의 이 떠올랐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가족을 다루기는 했으되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결이 달랐다. 가족과 기생충을 연결했던 내 어설픈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른바 사회적 계급을 건드린 영화는 가족들끼리의 소외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 간의 싸움이었다.최근 몇 주간 집 안에 스스로 발목을 가뒀다. 오래 묵혀둔 숙제를 거창한 핑계로 삼았다. 산에 못 가니 자꾸 화면 속으로 빠져든다. 좀 모르고 살아도 되는데 어쩌자고 나의 손바닥은 이리도 복잡한가. 그 좁은 면적 안으로 세상만사가 집결하고 그것은 이내 마음속 여러 갈피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근거 없는 불안과 지나..
상상해 보자. 전 세계 청년을 상대로 내일 글로벌 선거를 치른다면 제1 공약은 무엇일까. 단연 기후변화가 돼야 할 것이다.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연말 22개국 18~25세 청년 1만896명을 대상으로 현시대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를 물었더니, ‘기후변화’가 41% 응답으로 1위에 꼽혔다. 15살 여중생 그레타 툰베리는 2018년 8월의 어느 금요일,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의회 건물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보도되며 각국 청소년들이 금요일마다 기후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란 단체가 결성됐다. 2019년 3월15일엔 전 세계 110여개 국가에서 140만명이 참여한 동맹 휴학이 진행됐고, 5월과 9월, 11월에도 동시다발적인 ..
‘혁신위의 시간’이 끝났다. 지난해 초, 우리 사회를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 이후 이를 구조적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발족된 스포츠혁신위원회 활동이 7차례의 권고와 각 권고의 제도적 이행을 확실히 점검하고 마무리되었다. 스포츠윤리센터 설립, 스포츠기본법 추진, ‘학생 선수’를 포함한 엘리트체육 문화 혁신,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한 다양한 제도 권고 등은 향후 한국 스포츠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부터는 ‘문체부의 시간’이다. 장기적으로는 스포츠계 전체가 실질적인 주체이지만, 현재로서는 혁신위의 권고에 따른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비 및 인력, 재정, 문화 등에 대한 시스템의 변화를 도모할 단계이고, 이는 당연히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적 의무에 해당한다..
꼭 10년 전 제5회 지방선거가 있었다. 흔히 명명되기로 ‘무상급식 선거’였다. 무상급식 공약이 그야말로 전국을 휩쓸었다. 선거 구도가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 여부로 선명하게 나뉘었고, 나아가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의 구도로 확장됐다.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에 관한 논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애초 당시 여당(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으로 전망됐던 선거 결과는 ‘야당 승리’로 정리됐다. 무상급식을 전면에 내건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며 한국 사회는 보편적 복지의 시대로 패러다임 전환을 시작했다. 선거의 제1기능은 물론 누군가를 뽑거나 뽑지 않는 것, 즉 선출이다. 하지만 제5회 지방선거가 잘 보여줬듯 선거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계기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정치인과 정당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