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한 시간쯤 버스를 타고 낮은 산 아래 이어진 에움길을 돌아가야 닿는 중학교는 평화로워 보였다. 전교생이 2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학교는 봄이면 벚꽃잎이 날리고, 여름이면 학교 뒷산을 아까시꽃이 하얗게 뒤덮는다고 했다. 학생들이 서둘러 교문을 빠져나간 늦은 오후 학교 숙직실에 모인 교사들은 커피를 마시며 학교가 참 예쁘다고 얘기하다 웃으며 말했다. 학교는 학생들만 없으면 정말 좋다고. 직장인들이 할 법한 말이라 한때 직장인이었던 나도 같이 웃었다. 우연히 만난 이는 청춘을 교단에서 보낸 뒤 마흔 살 넘어 명예퇴직했다면서 아침마다 지옥에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로 한동안 그 학교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싫어서 먼 길을 돌아갔어요.”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작은 ..
지난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서울시교육청 등이 추진해온 초·중·고등학생 대상 모의선거를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불허했다. 선관위가 밝힌 불가 사유의 핵심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의 모의선거 결과는 총선 다음날인 16일에 공개된다. 공개도 안된 모의투표 결과가 실제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데다 청소년 참정권 취지 중 하나인 민주시민교육을 훼손하는 처사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편협하고 정치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인데, 선관위는 대한민국 교사들이 그렇게 경우 없고 형편없는 사람들로 보이는가?시대적 흐름에 따라 53만여명이나 되는 청소년이 시민으로서의 ..
1950년 2월9일 미국 공화당 여성당원대회에서 매카시가 서류뭉치를 꺼내 들고 “국무부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205인 명단이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매카시즘 시작일부터 70주년이 되기 딱 나흘 전인 지난 5일, 그 광풍에 영화로 맞섰던 커크 더글러스가 103세로 숨졌다. 는 더글러스가 제작과 주연을 맡아 매카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들을 과감히 기용한 영화다. 명장면은 노예 반란을 진압한 귀족 크라수스가 포로들에게 “스파르타쿠스가 누군지 지목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자 저마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며 일어서는 대목이다. 역사와 다른 시나리오를 쓴 돌턴 트럼보는 “할리우드에서 매카시 광풍에 반대하는 이들의 연대감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매카시즘을 걷어낸 최고 공로자로는 그 허구성을 폭로한 에드워드 ..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 역시 국민이 체감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회복세에 접어들던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에는 완치돼 퇴원하는 환자도 이어지고 있지만, 외국을 다녀온 적이 없고 국내 감염자와의 접촉도 확인되지 않은 확진환자까지 발생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어서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의료기관에서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일선 의료기관이나 지자체 등의 초동대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사태 이후에는 좀 더 세밀하고 명확한 판단 아래 감염병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겠지만, 코로나19 초기부터 느낀 점은 DUR(Drug Utilization Review) 시스템의 제도화이다.DUR은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로 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제도 가운데 하나는 언론이다. 그 까닭은 언론이 시민들의 ‘계몽적 이해’를 가능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다음의 다섯 가지 기준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적 이해의 확보, 의제 설정에 대한 최종적 통제의 행사, 성인들의 수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계몽적 이해란 구성원들이 정책 대안과 이 대안이 가져올 결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동등하고 효과적인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계몽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언론, 곧 공론장(public sphere)이다.공론장에 대한 선구적 담론을 남긴 이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여론이 형성되는 영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접 타는 전용기는 2대가 있다. 해외 순방 때 쓰는 공군1호기는 대통령이 탑승하면 ‘KAF(Korea Airforce) 001’이라는 고유의 콜사인을 관제탑에 보내고 이륙한다. 별칭 ‘코드원’이 붙은 이 전용기는 대한항공에서 보잉747-400 대형 기종(2001년식)을 2010년부터 장기 임차했다. 1985년 먼저 도입된 공군2호기는 대통령이 국내 이동 때 종종 타고, 국무총리나 대통령 특사의 해외 방문 때 주로 쓰이고 있다. 2018년 3월 대북특사단이 이 전용기로 방북했고, 그해 4·27 남북정상회담 후 백두산 방문 때는 삼지연공항의 협소함 때문인지 1호기는 평양순안국제공항에 서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상대적으로 작은 2호기를 이용했다. 흔히 ‘하늘 위 청와대’로 불리는 전용기는 성..
인간보다는 인공지능(AI)에 가까운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셜록 홈스. 최고의 두뇌와 달리 정서적 공감 능력은 제로다. 잔혹한 범죄 현장에서도 동요는커녕 감정은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사건은 복잡할수록 흥미로운 게임일 뿐이다. 스스로 소시오패스 성향임을 인정은 하지만 다행히 인지적 공감능력은 있다. 일본 추리물의 대표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탐정 갈릴레오도 비슷하다. 괴짜 천재 물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비이성적인 것을 극히 싫어하는 인물이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도무지 논리가 통하지 않는 존재여서이다. 소설, 드라마에서나 흥미롭고 매력적일 뿐, 현실에서 만나면 눈치도 인간미도 없어 꽤나 불편할 듯한 캐릭터들. 기질에 따라 범죄자거나 그 ..
감염원이 파악되지 않은 코로나19 환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18일 대구에 사는 61세 여성이 31번째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 확진자는 해외여행 이력이 없으며 감염경로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29번째 환자(80대 남성) 역시 기존 확진자와 접촉한 이력이 확인되지 않는 등 감염경로가 불투명하다. 정부 방역체계 밖에서 환자가 발생하면서 코로나19 사태가 새로운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31번째 확진자는 영남 지역의 첫 코로나19 환자다. 수도권에서 시작된 확진자 발생 지역이 호남, 충청에 이어 영남권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감염 지역이 확산되고, 감염경로가 미궁인 환자 발생이 이어지면서 코로나19가 지역사회 감염으로 번지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 정부는 ..